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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 통일 생각, 북녘 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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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핵 롤러코스터」①장 핵심 발췌

"당신이 없으면 우리도 없습니다." 

(1994년 북미 간 '기본 합의'가 이루어진 지 6년 뒤인 2000년 6월 남북정상회담이 열리다.)

 

2000년 10월 12일 저녁, 나는 북한의 수도 평양의 거대한 5.1경기장에서 10만명이 넘는 군중이 세계에서 가장 유별나고 수수께끼같은 지도자 김정일에게 충성을 맹세하는 것을 지켜보았다. (집단 체조)  작고 땅달막하고 작업복 차림의 '경애하는 지도자'는 다른 고위 관리들에 둘러싸여 만면에 만족스런 웃음을 지으며 자신 있는 걸음걸이로입장해 스탠드 아래의 군중들에게 얼마간 기계적으로 손을 흔들었다.  카드 섹션 참가자들이 '위대한 영도자김정일 동지에 최고의 영광을'이란 구호를 펼치고 취주악대가 <김정일 장군의 노래>를 힘차게 연주하는 가운데, 아이들이 김정일에게 꽃다발을 바쳤다. 군중들은 '당신이 없으면 나라도 없습니다.' '당신이 없으면 우리도 없습니다.'를 일제히 합창했다.

 

11년간 이어진 북한 방문 중 그때가 12번째 방문이었다. 첫 방문은 내가 베이징 특파원으로 있을 때인 1989년 7월에 이루어졌다. 평양 정부는 당시 남한의 법을 어기고 금단의 땅 북한을 방문한 남한 여대생의 활동을 취재할 수 있도록 소수의 베이징 주제 서방 특파원들을 초청했다.

 

3년 뒤인 1992년, 북한은 빌리 그레이엄 목사를 초청하였고, 목사는 CNN을 방문 취재 동행자로 선택했다. 나의 첫 방문 이후 세계는 급변했다. 베를린 장벽 붕괴, 소련 및 다른 사회주의 동맹국들의 붕괴, 모스크바와 베이징의 한국과의 외교관계 체결, 중국의 시장형 경제 개혁, 걸프전에서 미군의 사담후세인 제압,

 

극적으로 변화된 전략적 상황은 김일성과 김정일로 하여금 세계 유일의 초강대국 미국과의 타협만이 정권의 지속적인 생존을 보장해 줄 것이라는 결론에 도달하도록 만든 것이 분명했다.

 

그레이엄 목사는 회담에서 조지 W. 부시의 구두 메시지를 김일성에게 전달했다. '위대한 수령'은 작달막하지만, 딱 벌어진 어깨와 깊은 목소리, 그리고 툭 튀어나온 배를 가진 위풍당당한 인물이었다. 또한 오른쪽 목덜미에 오렌지 크기만 한 혹 덩어리가 있었는데, 그것은 김일성이 없애지 않기로 한 양성 종양이었다. 그의 측근들은 그를 공경하고 두려워하는 모습이 역력했다. 북한 사진 기자들조차 김일성이 방에 들어서자 고물 카메라를 향해 그가 몸을 돌리기 전에 공손하게 머리 숙여 인사했다.

 

김일성을 관찰하면서 나는 그가 통칳는 사회의 역학구조를 이해하고자 애썼다.

 

나는 북한을 단순히 또 하나의, 그러나 약간은 기괴한공산주의 국가로 보는 것은 생산적이지 못하다고 생각하게 됐다. 북한에 대한 최상의 비유는 유교 전통에 깊이 물든 보수적이고, 내부 지향적인 사회에 접목된 종교 집단이 아닐까 한다. 여기서 삶의 목적은 당대의 신성성, 즉 위대한 수령을 찬양하는 것이다.

 

갈수록 차가운 시선을 보내는 세계에서 생존의 사투를 벌이며 마치 영구적인 포위 상황에서나 감지되는 지도자를 중심으로 똘똘 뭉친 한 사회의 압도적인 흥분 상태를 자아냈다. 외부 세계에서 보면, 북한은 위협적이고 호전적이다. 그러나 내부에서 보며, 북한의 공격적인 면모는 본질적으로 공세적이기보다는 수세적이다.

 

그레이엄 목사의 방북 2년 뒤인 1994년 4월 16일, 나는 김일성을 다시 만났다. 마지막 만남 이후 북한의 핵 프로그램 탓에 긴장은 극적으로 높아진 상태였다. 미국은 한국전쟁에서 신속한 승리로 전쟁을 종결짓기 위해 핵무기 사용을 거론한 이래, 한반도에는 항상 핵무기의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었다. 핵폭탄을 갖고자 하는 김일성의 관심은 바로 이때부터 시작된 것으로 여겨진다. 1950년대 말, 평양 북쪽 영변에 핵 연구단지가 조성되었고, 1980년대 말까지 5메가와트급 원자로가 전면 가동됐다. 북한은 1985년 비확산금지조약에 서명했음에도 1992년 국제원자력기구는 북한이 제공한 데이터에서 불일치를 적발해냈다. 미심쩍은 자료는 북한이 이미 영변의 원자로에서 추출한 연료에서 무기급 플로토늄을 생산했으며, 이를 숨기고 있다는 의혹을 부풀렸다. IAEA는 특별 사찰을 요구했다.  

 

1993년 초 북한은 이에 대응해, NPT 탈퇴 계획을 발표했다. 이같은 위협에 이어 잠재적으로 핵탄두를 동해로 날려 보낼 수 있는 노동 1호 미사일을 시험 발사했으며, IAEA 사찰단원의 접근을 제한했다. 북한 당국은 또 영변 원자로에서  사용후 연료봉을 제거하고 이를 재처리해 무기급 플로토늄을 만들겠다고 위협했다. 북한이 핵 능력을 확대할 찰나에 있다고 우려한 클린턴 정부는유엔에 제재 결의안을 상정하겠다고 위협했다. 평양은 그오 ㅏ같은 조치를 '전쟁 행위'로 간주하겠다고 선언했다.

 

4월15일 김일성의 여든두번 째 생일잔치에 참석하는 소규모 해외 유명 인사 사절단을 취재하도록 초청받았다. 그는 말했다. "세계는 지금 우리에게 우리가 갖고 있지도 않은 핵무기를 보여달라고 한다. 우리는 현재 상태로도 충분하다. 그것을 갖는다 한들 어디에 쓰겠는가? 우리는 전쟁을 원치 않는다.(중략) 우리는 그동안 이 나라에 아주 많은 건물을 세웠는데,그것들을 무너뜨리고 싶지 않다. 전쟁을 원하는 자들은 정신 나간 사람들이다."

 

8천개의 사용후 연료봉을 영변 원자로에서 제거하면서도 평양은 자국에 대한 긍지를 드높이는 협상 지렛대로 삼기 위해 김일성의 말을 또 다른 전형적인 벼랑 끝 전술(brinksmanship)로 따르고 있었다. 핵확산 전문가에 따르면, 북한은 핵연료 제거 과정에서 "IAEA가 원자로 노심의 연료봉 각각의 상태를 점검할 수 있도록 허락하지 않았고, 그 결과 원자로의 가동 내역을 측정하고 전체 플루토늄 양을 판단하는 데 필요한 핵심 기술 수단을 없애버렸다."는 것이다. 그 결과 북한이 이미 상당한 무기급 플루토늄을 생산했는지 여부를 판단하는 일은, 불가능하지는 않더라도 아주 어렵게 되었다. 더욱이, 연료봉이 재처리되었다면, 북한은 5~6개의 핵무기를 더 만들었을 수도 있다고 전문가들은 주장했다.

 

1994년 봄에서 여름으로 접어드는 사이, 클린턴 행정부는 군사적 선택을 진지하게 고려하기 시작했다. 한국에 거주하는 미국인을 소개하고 핵 시설을 정밀유도폭탄으로 파괴하기 위해 영변을 선제공격하는 작전이 세워졌다. 미국의 지휘관들은 이 같은 공격에 대해 북한이 한국을 공격하는 것으로 대응하리라고 확신했다. 주변 강대국의 오랜 희생양이었다가, 김일성에 의해 창안된 지도 이념인 주체 사상 체제 아래 새롭게 조직된 나라에서 김일성이 외부의 압력, 특히 미국의 압력에 굴복할 가능성은 결코 없었다. 미국의 군부는 전면전이 일어나면 한국에 주재하는 미국인 약 10만 명을 비롯해 1백만 명에 이르는 사람들이 사망할 것으로 추산했다.

 

재앙을 향한 급전직하의 상황에 놀란 미국의 전 대통령 지미 카터는 6월 중순, 사태에 개입하기로 하고, 김일성과 회담하기 위해 평양으로 갔다. 이미 4월에 CNN을 통해 보도된 김일성과의 인터뷰 내용이 북한 당국에 CNN의 세계적인 방송망에 대해 다시금 깊은 인상을 심었다. 나는 그와 함께 방문하도록 허락받았으며, 북한 당국에 의해 그를 동행 취재할 유일한 언론인으로 지명되었다.

 

김일성 곁에는 예전 미국과의 외교적 만남에서 비록 거칠지만 베테랑답게 알아듣기 쉽도록 자신의 논리를 전개했던 강석주 북한 외무성 제1부상이 있었다. 6월16일 카터는 협상의 개괄적 조건을 중재하며, 이 같은 조건 아래 북한의 지도자는 미국의 제재 움직임 중단 및 워싱턴과의 회담 재개를 대가로 핵 프로그램을 동결하는 데 동의했다. 전직 대토령은 클린턴 행정부의 고위 관리들이 전쟁 계획을 끝내고 있는 그 순간, CNN과의 생방송 인터뷰를 통해 획기적인 진전 내용을 발표했다. 워싱턴의 고위 관리들은 회의를 중단하고 카터의 뉴스를 듣기 위해 백악관의 텔레비전 앞에 둘러 앉았다.

 

위기일발의 대치 상황은 이렇게 간신히 모면했다.

 

넉달 후 1994년 10월  21일, 강도 높고 힘든 협상 뒤, 로버트 갈루치 국무 차관보와 강석주는 기본 합의(Agreed Framework)라고 부르는 3쪽 자리 문서에 서명했다. 핵 회담은 같은 해 7월 심장 발작에 의한 김일성의 돌연한 사망과 김정일의 권력 승계를 둘러싼 불확실성으로 인해 복잡해지기도 했다. 그런 북한은 정치적으로 안정되어 보였고, 김정일은 자신으 아버지가 지미 카터에게 했던 약속의 이행을 간절히 원하고 있음이 분명했다.

 

기본 합의는 실질적인 의도로만 보면 조약임이 분명했지만, 김정일 정권에 득이 되는 그 어떤 거래도 반대하는 미국 내 공화당으로부터의 저항 가능성이 엄연한 현실을 고려해, 클린턴 행정부는 의회의 공식적인 비준 절차가 필요 없는 형태로 조약을 만들고 싶어했다. 기본 합의에 따라 영변의 5메가와트급 시설, 즉 북한에서 유일하게 가동 중인 원자로를 동결하기로 약속했다. 아울러 다른 두 개의 원자로 건설도 중단함과 동시에, 북한 핵 시설은 국제사찰을 받아야 했다.

 

미국으로서는 2003년까지 두 개의 경수로를 건설하기 위한 국제 컨소시엄 구성을 지원키로 약속했는데, 이는 핵폭탄을 제조하는 데 사용될 수 있는 물질을 적게 생산했기 때문에 '확산 내성적'인 것으로 여겨졌다. 워싱턴은 그 사이 매년 중요 50만 톤을 공급해 북한이 에너지 수요에 대처할 수 있게 하고, 궁극적으로는 완전한 관계 정상화의 방향을 외교적 관여를확대해나가기로 합의했다. 북한은 경수로 준공 이전에 의무적인 '특별 사찰'을 허용할 것을 포함해 IAEA 프로그램에 전적으로 따르고, 궁극적으로는 기존의 5메가와트급 원자로와 다른 두 개의 건설 중인 원자로까지 폐기해야 했다.

 

기본 합의가 체결된 직후, 북한은 원자로 가동을 중단하고, 미국인 몇 명을 비롯한 사찰단원들이 영변으로 복귀하도록 허용했다. 평양은 미국 전문가 팀과 협력해 5메가와트급 원자로에서 빼낸 8천 개의 사용후 연료봉을 냉각조에 안전하게 보관했으며, 결과적으로 자칫 핵폭탄으로 전환되었을지도 모를 플로토늄에 대한 국제적 모니터링이 지속되도록 보장했다. 1995년 3월, 미국, 일본, 한국은 경수로 건설을 감독할 컨소시엄을 발족했다. 예상액 30억 달러에 이르는 건설비를 누가 지불할 것인지, 그리고 누가 원자로를 지을지(한국은 자국 회사가 공급하기를 원했지만, 평양은 처음에는 비한국계 회사를 고집했다.)에 대한 옥신각신에도 불고하고 기본사항에 대한 합의가 이뤄졌으며, 한반도에너지개발기구KEDO가 마침내 완전 가동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기본 합의는 체겨뢰던 그 순간부터 미국에서 회의적인 반응을 얻었다. 북한의 플루토늄 생산을 중지시킨 점에 촛점을 맞추는 대신, <뉴욕 타임즈>의 헤드라인은 다음과 같았다. '대북 협정 미국의 양보 포함: 기본 합의, 핵심 플루토늄 제조 시설 향후 7년간 존재토록 허용.' 공화당의 클린턴 비판은 행정부가 북한에 너무 많은 것을 준 반면, 충분한 대가를 덛어내지 못했다고 비난하는 등 훨씬 더 혹독했다. '유화 appeawement', '굴복 surrender'이라는 단어가 공중파를 가득 메웠다.

 

협약이 체결된 뒤 불과 17일 만에 공화당은 중간 선거에서 상원과 하원 모두를 장악했다. 이후 몇년 간 많은 전선에서 공화당에 포위된 행정부는 심지어 기본 합의에 의해 약속된 중유 선적에 드는 적은 비용에 대해서도 의회의 승인을 얻느라고 악전고투했다. 케도에 대한 자금 공급도 중유 선적이 툭하면 지연되는 결과를 빚으며 똑같이 논란이 됐다. 아울러 경수로 건설이 뒤늦게 착수되어 당초 예정된 2003년 준공 목표를 아득히 먼 일로 만들었다. 워싱턴은 북한에 대한 제재를 거의 완화하지 않았다. 워싱턴도, 평양도 합의를 파기하지는 않았지만 한반도의 오랜 갈등이 마침내 해빙을 맞을 전망은 자취를 감췄다.

  

  의회의 반대와 모니카 르윈스키 스팬들에 의해 입지가 손상된 클린턴은, 북한처럼 구미가 당기지 않는 정권에 관여하는 정치적 발상을 지원해줄  정치적 자본을 거의 확보할 수 없었다. 한편 북한은 북한대로 클린턴 행정부가 약속을 지키지 않는다는 데 당혹감이 높아만 갔다. 1995년과 1996년 내가 평양을 방문했을 때 북한 관리들은, 협상을 지지하고 워싱턴과의 관계를 개선하고 싶어 하는 외무성의 '온건파'와 북한이 기본 합의를 통해 뭔가를 얻어낼 수 있다는 것에 회의적인 군부 '강ㄱ여파' 간의 견해 차이를 암시했다. 국영 매체는 북한이 기본 합의를 철회할 가능성이 있으며, 따라서 미국이 자신의 의무사항을 이행하지 않을 경우 핵 프로그램을 재개할 수도 있다는 위협적인 논평을 주기적으로 내기 시작했다.

 

  그렇다해도 1994년에 워싱턴과 북한을 전쟁 직전 상태로 몰고 갔던 북한의 핵 야망의 직접적인 위기는 완화된 상황이었다. 어떤 결함이 있는 기본 합의가 핵 프로그램이 본 궤도에 오를 정도로 급격히 확대되는 것을 막았다는 사실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핵 전문가 데이비드 올브라이트 David Alvright가 지난 2002년에 지적했던 것처럼, 기본 합의가 북한의 핵 프로그램을 '동결'시키지 않았더라면, 북한은 2000년까지 3백~4백 킬로그램의 무기급 플로토늄을 축적했을 것이다. 핵무기 하나에 5킬로그램이면 충분하므로, 이 정도 플로토늄 양이면 60~60개의 핵무기를 만들기에 충분하다.

 

  그러나 북한은 1990년대 중반 새로운 위기에 직면했다. 참혹한 홍수 피해와 턱없이 부족한 수확량, 그리고 이 나라의 중앙계획식 사회주의 경제의 비효율성은 대규모 식량 부족 사태를 불러왔다. 연료와 전력의 부족으로 경제가 결딴나면서 북한의 산업과 운송 부문은 멈춰벼렸으며 경제는 실질적으로 무너져내렸다. 기아 사망자 수 추정치는 전체 북한 인구의 거의 10퍼센트에 해당하는 2백만 명에 이르렀다. 상황이 너무 심각하여, 1997년 미 중앙정보국은 북한이 5년 안에 무너질 것이라고 내다봤다. 2006년 해제된 한 비밀 보고서에서 CIA는 "북한의 현 상황은 정권의 존속을 근본적으로 위협하지 않는 교정적인 조처가 불가능해 보인다."라고 보고했다.

 

1990년대말 북미관계가 냉랭해지면서 평양은 김정일 정원의 붕괴가 바로 미국이 노리는 목표라는 믿음을 유지했던 반면, 미국은 공화당의 클린턴 비판자들은 물론 정부 관리들까지 평양이 궁극적으로 핵 야심을 포기하지 않았다는 우려를 떨치지 못했다. 1978년 7월, 전 국방장관이자 미래의 국방장관 도널드 럼스펠드(럼스펠드는 이미 포드 정부에서 국방장관을 역임한 바 있다.)가 이끄는 공화당 주도의 한 위원회는 북한의 탄도미사일 위협이 미국의 정보 당국에 의해 과소평가되었으며, 북한은 경고가 거의 없거나 아예 없이' 미국을 때릴 수 있는 미사일을 발사할 지 모른다는 내용의 보고서를 발간하였다.

 

위원회는 의회 공화당 우파의 압력 아래 구성되었으며, 이들 우파는 불량 국가들 rogue states의 공격으로부터 미국을 지키기 위해 미사일 방어 체제를 구축하는 일에 몰두하고 있었다.

 

한반도 정책에 대한 논란이 워싱턴에서 가열되던 1998년 8월 17일, 미국의 첩보위성이 영변 핵 시설에서 그리 멀지 않으 금창리에서 새 지하구조물을 발견했다는 주장이 뉴욕타임즈에 새어나가면서 북한에 대한 우려가 고조되었다. 몇몇 전문가들은 금창리의 터널 안에 비밀 원자로 또는 재처리 시설이 숨겨져 있을 것이라고 믿었ㄷ. 이 보도가 워싱턴 전역으로 퍼지면서 일부는 기본 합의의 파기를 요구했고, 존 매케인 상원의원 등 몇몇은 군사 행동을 촉구하고 나섰다.

 

나는 이같은 혼란의 와중에 또 한 번 평양의 부름을 받았다. 나와 카메라팀이 도착한 8월31일, 북한은 3단계의 대포동 1호 미사일을 처음으로 시험 발사했다. 동해안에서 발사된 액체연료(주입)식 미사일은 태평양에 떨어지기 전 일본 상공을 날아 주일 미군을 타격할 수 있음을 확인해 주었다. 미국 관리들은 곧 미국에 도달할 능력을 가진 대포동 2호 장거리 미사일의 시험이 이어질 것을 우려했다.

   

금창리와 관련된 정보 누설과 미사일 발사 시험은, 이미 흔들리던 위성턴 내의 기본 합의에 대한 정치적 지지를 크게 손상시켰다. 클린턴 대통령은 이러한 강한 압박에 못 이겨 미국의 대북 정책을 재검토할 고위급 조정관을 임명하였다. 그 일을 1994년부터 1997년까지 국방장관으로 일했고, 카터 행정부 때도 팬타곤에 있었던 윌리엄 페리에 맡겼다. 첨단 무기 전문가이며 차분한 스타일의 페리는 정치 색깔을 떠나 폭넓은 존경을 받았다. 게대가 그는 미국이 영변 핵 시설에 대한 선제 공격 직전까지 갔던 1994년 6월, 바로 그 문제를 관할하면서 북한 문제에 대한 나름의 경험을 쌓았다.

 

페리가 자신의 정책을 검토하던 무렵인 1990년 초반, 전 국방 차관보이자 공화당의 아시아 정책 전문가인 리처드 아미티지는 훨씬 더 강력한 대북 접근법을 주장한 이른바 '팀 B' 보고서를 펴냈다. 아미티지는 관여정책 engagement 발상은 지지하면서도, 클린턴 정부의 대북 정책 내용과 전술에 대해서는 상당히 비판적이었다. 이 보고서는 기본 합의를 북한 핵 프로그램에 대한 불충분한 봉쇄장치라고 기술했으며, 기본 합의, 특히 그중 에너지 공급을 다룬 부분을 재협상하라고 촉구했다. 보고서는 또 미국이 일본에 패트리엇 미사일 포대를 배치해 '억지적 군사 태세'를 강화하자고 제안했다. 보고서는 덧붙여, 북한이 미사일을 수출하기 전에 차단할 수 있는 방법을 연구하고, 북한을 선제 공격하며, 평양이 선을 넘을 경우 미국에 의한 강력한 응징이 뒤따르는 금지선red line을 그을 것을 제안하였다. 아미티지보고서와 럼스펠드 위원회는 모두 훗날 럼스펠드나 울포위츠와 마친가지로 그 자신이 요직에 오르게 될 부시 정부의 대북 기초를 닦았다.

 

아미티지 보고서가 발표된 지 두달째인 1999년 5월, 한중일과 협의 끝에, 페리와 소규모 대표단이 평양을 방문했다. 이 대표단의 다른 멤버들은 대통령과 국무장관 특별보자관이자 대북정책 조정관인 웬디 셔먼 미시간 대학 출신의 저명한 중국 전문가로서 국가안보회의 아시아 국장을 맡기 위해 학계를 떠난 케니스 리버설, 국무부 한국 데스크 과장으로 한국어를 구사하는 외교관 에번스 리비어(2009년 현재 코리아 소사이티 회장 -  옮긴이), 그리고 다른 두 명이 있었다. 페리는 연쇄 회동에서 북한 측에 현재의 상황은 결코 옹호될 수 없다고 직설적으로 말하며 두 가지 길을 제시했다. 하나는 핵과 미사일 프로그램을 제거해 관계를 개선하고 대화를 확대하는 길로, 이는 경제 제재의 해제와 함께 워싱턴과의 최종적인 관계 정상화를 가져오는 것이다. 그는 북한에 워싱턴으로 고위급 특사를 보냄으로써 응분의 답례를 취해줄 것을 청했다. 동시에 그는 긴장 고조와 적대로의 하향 곡선이라는 또 다른 길을 강조했다. 북한 인사들은 호전적인 태도를 굽히지 않았다. 케네스 리버설은 북한의 한 고위 장성의 다음가 같은 적대적인 반응에 깜짝 놀랐다.

 

"이 사람들은 그 자리에서 그(페리)의 말을 들었다. '장관의 말씀 매우 감사하게 들었다. 나는 장관님 출신 배경을 잘 알고 있다. 나는 장관이 어디 출신인지도 잘 알고 있다.'라면서, 페리가 성장했던 도시 이름을 댔다. 그러더니 계속해서, 만약 미국이 북한에 대해 무력을 사용한다면, 페리의 고향은 아예 날아가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평양을 빠져나오는 비행기에서 페리와 그의 동료들은 자신들이 들은 사안의 중요성을 놓고 토론을 벌였다. 한 참석자의 말이다. "북한 사람들이 뭔가를 마라려고 할 때 전체적인 메시지는 전형적이다. 비난조에, 방어적이며, 그것은 모두 당신네 잘못이고, 당신네들은 약속을 지키지 못ㅎㅆ으며, 관계가 나쁜 모든 이유도 당신네들 때문이고, 당신네들은 우리와 관계를 개선하려는 시도조차 없지 않느냐, 등이다. 이런 말들은 노상 쏟아지는 말들이다."

 

다른일행으로, 한국어 구사 능력이 있는 에번스 리비어는 다른 견해를 취했다. "내 느낌은 우리가 보아 주의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었다. (중략) 때때로 북한 사람들이 '노'라고 하는 것은 '예스'를 뜻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기본적으로는 이 말이 내가 (그 때) 내가 하고자 했던 말이었다. 나는 북한 사람들이 격렬하고 적대적으로 우리 구상을 비판했던 과거의 실례 몇가지를 들었다. 나는 페리에게 북한을 상대할 때는, 당신이 생각하는 것과 항상 같지 않으며, 특히 처음의 반응은 방어적이고 비난조에다 적대적이며, 이는 북한 사람들에게는 예사라는 점을 상기시켰다. 그러나 나는 얼마간 희망을 주는 몇 가지 코멘트가 나온 점에 주의를 환기시켰다. 북한이 노골적으로 대화를 거부하는 것이아니었다는 것, 또 처음에는 익숙한 비난조의 언사로 반응했다가 나중에는 우리의 진설성에 촛점을 맞춰 질문을 제기했다는 것 등을 언급했다 .이와 아울러 나는, 바로 이 지점에서 문은 아직 조금 열려 있는 것 처럼 보이며, 우리에게 시간이 필요할 것이라고 말했다."

 

캐네스 리버설도 비슷한 평가를 내리고 있었다.

 

그는 말했다. "김정일은 자기가 매우 불리한 위치에서 움직인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리고 사방에서 자기를 짓밟을 수 있ㄴ느 사람들과 게임을 하고 있다. 그는 한국보다 약하고, 일본보다 약하며, 중국보다 약하다, 그가 미국보다 약하다는 것은 하늘도 알고 있다. 만약 군사적 대결 국면이 오면 그는 죽은 목숨이다. 약자로 게임을 해야 하는 그의 전략은 되도록 강하게 보이는 것이다. 타협보다는 확전을 꾀하는것이 미국에 대해 특히 효과가 있다는 것이다. 미국에는 그것이 대수롭지 않은 문제이지만, 그에게는 아주 중요하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뭔가를 팔아치우려는 목표, 그리고 이를 통해 뭔가를 얻어내려는 목표와 연동된다. 그리고 그는 뭔가를 팔아치우려 할 것이다.

 

페리가 평양행을 준비 중일 때, 찰스 카트먼은 금창리 핵 의심 시설에 접근하는 문제를 두고 북한과 협상을 진행하고 있었다. 국무부에서는 누구에게나 '척Chuck'으로 통하는 카트먼은, 끈질기게 앉아 협상 테이블 너머로 북한 대표들이 쏟아내는 독설과 허풍, 위협 따위를 경철할 줄 아는 능력 덕문에 '쇠뭉치iron butt'라는 별명을 얻었다. 뉴욕 타임즈의 경고성 기사에도 불구하고 미국 정보 계통은 북한이 실제로 무엇을 하고 있는지에 대해 의견이 첨예하게 갈렸다. 패트릭 휴즈 소장이 읶는 국방정보국(국방부 산하 정보기관)은 금창리가 비밀 지하 원자로 공사 현장이며, 금창리의 존재는 평양이 기본합의를 기만하고 있음을 입증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CIA를 포함한 다른 정보기관은 좀 더 회의적이었다.

 

클린턴 행정부의 한 고위관리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나도 그 물증들을 보았다. 그리고 그들이 지적했던 거의 모든 것이 순진한 설명이라는 것을 알게 됐다. 다른 정보 계통 종사자들도 거의 똑같은 자료를 보고 국방정보국 측 주장을 들은 뒤, 근본적으로는 근거가 빈약하다고 말했다."

 

그러나 금창리 의혹은 여전히 큰 문제들을 만들었고, 이 산안이 제대로 처리되지 않으면, 이미 얼룩지고 위기에 처한 북미 간 대화는 파멸을 맞을 것이 분명했다.

 

직접적인 비난이나 위협은 피하는 한편, 어떻게 하면 양측이 난관을 무사히 통과할 수 있을지를 고려해서 계획을 짜는 카트먼의 스타일은 다년간, 그리고 수백 시간에 걸친 북한과의 상호작용을 통해 형성된 것으로, 그는 이러한 경험을 통해 북한이 코너에 몰린다고 판단하면 오히려 덤벼드는 경향이 있다고 결론내렸다. 그의 접근법은 성과를 얻었다. 1999년 5월 북한은 미국 사찰 요원들의 금창리 방문을 허용키로 동의했다. 최초 한 차례 방문에 3억 달러를 요구했던 북한은 결국 감자 10만 톤의 선적을 '대가'로 금창리 사찰을 받아들였다.

 

그러나 미국인들이 발견한 것은 당혹스럽게도 규모가 크고 텅 빈 지하 동굴이었다. 비밀 핵 장소라는 물증은 전혀 아니었다. 위기는 지나갔다.

 

1999년 10월 페리는 오랫동안 기다리던 보고서를 펴냈다. 전 국방장관인 그는 평양 정권이 붕괴 직전 상태에 있다는 견해를 부정했다. 보고서는 또 "조선민주주의공화국이 안고 있는 명백한 문제가 궁극적으로는 정권의 변화를 초래할 것이라는 예상이 논리적으로 합당하지만, 변화가 임박했음을 보여주는 증거는 없다는 것이다. 따라서 미국의 정책은 희망하는 바가 아닌, 있는 그대로의 북한 정부를 다뤄야 한다."라고 썼다. 페리는 이 같은 상황에서 미국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북한 미사일과 핵 프로그램의 '완전하고 검정가능한 중지'라고 주장했다. 보고서는 또 영변 행 시설의 동결을 이끌어 낸 것을 들어 기본 합의를 인정했으며, 워싱턴의 장기 목표를 달성하는 최선의 방법은 고위급 회담을 통해 평양과 관계를 유지하고, 제재 종식과 궁극적인 경제.정치 관계의 정상화 방안을 제시함으로써 '한 걸음 한 걸음씩, 상호적인 방식으로, 북한이 위협이라고 인식하는 대북 압력을 완화시키는 방향으로 움직이는 것'이라고 결론내렸다. 이와 동시에 북한이 협력하지 않는다면 미국이 좀 더 단호한 일련의 정책을 펴게 될 것이라는 점을 분명히 했다."

 

한 분석가는 페리의 접근법을 '더 큰 당근과 더 큰 채찍'이라고 불렀다.

 

북미관계가 악의에 찬 상호 비난과 팽팽한 외교적 대화 사이를 오락가락하는 사이, 한반도 정치 풍경은 1997년 연말 김대중이 한국대통령으로 당선되면서 극적으로 바뀌었다.

 

김대중은 북한에 대한 종래의 한국에 대한 강경한 접근법을 근본적으로 전환할 것을 제안했다. 대신 그는 이른바 '햇볕정책'을 주장했다. 남측은 북한 붕괴후 벌어질 탈북 난민의 대량 유입과 내부 불안 상황을 결코 통제할 수 없을 것이라는 믿음을 바탕에 깔고, 김대중은 무역과 경제 관계의 확대 및 인적 접촉의 증가를 통해 평양과 관계 맺기를 모색했다. 김대중은 북측에 대한 남측의 투자 제한을 완화했으며 인도적 지원을 늘렸다. 1998년 말, 남쪽의 현대 기업은 북한의 명승지인 금강산에 관광지를 개발하고, 비무장지대 이북에 경제 특구 조성지를 물색하기로 북측과 합의했다.  

 

관여정책을 촉구하는 일에 한국의 지도자가 전 국방장관 페리와 동참하자 클린턴 행정부는 당시로서는 가장 중대한 이슈였던 북한의 탄도 미사일 개발 및 수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일련의 회담에 착수했다.

2000년 1월, 찰스 카트먼은 미국대표단을 이끌고 베를리에서 북한 측과 만났다. 카트먼은 북한의 고위급 특사가 워싱턴을 방문할 것을 예상하면서 일이 성사됐을 경우를 대비한 공동성명 초안을 작성했다. 초안은 로버트 칼린과 공동 집필했다. 칼린은 CIA에서 18년간 북한을 분석했으며, 1992년 이후에는 국무부의 정보 부서인 정보조사국에서 유사한 업무를 담당해 온 북한 문제 베테랑이었다. 1990년대에 미국의 외교접촉범위가 넓어지면서 칼린은 평양과의 협상에 개입된 미국 관리들에게 실용적인 형태로 정보를 가공하는 창구가 됐다.

 

초안은 '양측 정부 어느 쪽도 상대방에 대해 적대적 의도를 갖지 않을 것'이라는 문구를 포함했으며, '과거의 적대 관계에서 자유로운 새로운 관계 건설'을 위한 양측 정부의 희망을 강조했다. 카트먼은 베를린 회담에서 북한 측에 그 성명안을 건냈다. "우리는 우리의 적대적 태도가 양국 관계 개선의 큰 장애물이라는, 회담 때마다 그들에게 들었던 바로 그 말을 오히려 그들에게 되돌려주려고 했다."라고 그는 말했다.

 

다음 달, 오랜 대북 정보 전문가는 평양의 정책 변화가 가능함을 보여주는 흥미로운 조짐을 발견했다. 국영 조선중앙통신은 제1부총리가 북한이 군사적으로 충분히  강력하다는 사실과 더불어, 북한은 이제 경제개발에 집중해야 한다고 선언했다고 보도했다. 칼린은 20년간 북한 선전물을 연구하며 터득한 기술을 이용해 즉각 행간의 뜻을 읽어낼 수 있었다.

 

그는 자신의 감을 카트만에게 얘기했다. 두 사람은 기아가 북한 사회를 초토화해 북한 지도부 안에서 조차 정권유지를 보장하기 위해서는 모종의 개혁이 긴급하다는 인식이 확산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는 데 견해가 일치했다. 우리에게 협상에 써먹을 많은 자산이 생긴 것이다. 저들이 촛점을 맞추고 싶어하는 것은 바로 경제였다.

 

5월 말, 과거 20년간 중국을 방문한 적이 없는 김정일이 비밀리에 중국을 여행하였다. 그가 출발한 뒤 중국의 국영 인민일보는 김정일이 중국의 경제 개혁과 대외 개방 정책을 치하했다고 인용 보도했다. 그것은 '경애하는 지도자'가 적어도 북한이 중국의 전례를 따를 것인지, 만약 따른다면 어떻게 따를 것인지를 심사숙고하고 있다는 흥미로운 징후였다.

 

2주 뒤인 2000년 6월 15일, 역사적인 전환점이 왔다. 미국에는 비밀에 부친 몇 달 간의 협상 끝에 한국의 김대중 대통령은 김정일과의 정상회담을 위해 평양으로 날아갔다. 그것은 남북한 국가원수 사이에서 이뤄진 첫번째 회담이었다.

 

김대중 대통령은 나와 가진 인터뷰에서 다음과 같이 기억을 더듬었다.

"북측 공항에서 비행기 문이 열린 뒤 나는 아래를 내려다 보았다. 그리고 거기에는 아주 작달막한 김정일 위원장이 서 있었다. 바르 그제서야 나는 그가 마중 나왔다는 사실을 실감했다. 그 때의 기분을 무어라고 표현하기 어려다. 나는, '북한 지도자를 정말로 만나게 되는구나. 그리고 그와 나는 우리 민족 공동의 미래와 공동의 운명을 극적으로 변화시킬 뭔가를 이룩해야만 한다'고 생각했다."

 

건배 제의와 관계 개선에 대한 다짐 사이에서 이어진 이틀 간의 회담 뒤, 양 김은 통일을 '자주적으로 이루고', 경제 협력에 속도를 낼 것을 약속하는 5개항의 공동선언에 서명했다. 정상회담은 반 세기 이상 누적되어온 모든 긴장상태와 오래된 상흔을 완전히 해소하지는 못했으며, 남북 화해는 여전히 좌절된 시도로 남았다. 그럼에도 우호적인 분위기는 놀랍게도 한반도 분위기의 폭넓은 변화를 반영했다. 그리고 김정일은 자신의 국제무대 대뷔를 통해 위험인물이라는 국제사회의 평판을 상당히 떨쳐낼 수 있었다. 이는 '경애하는 지도자' 스스로가 정상회담이 끝난 직후 한국출신 미국 언론인 문명자 씨와 가진 대화에서 강조했던 점이다.

 

그는 문씨에게 이렇게 말했다. "내 이미지가 남조선 사람들에게 아주 부정적이었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텔레비젼 화면에 나타난 뒤에는 남조선 사람들도 내가 머리에 뿔 달린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확실히 알았을 것이다."

 

그의 말은 옳았다. 남한에서 정상회담 취재를 하는 동안 나는 남측 사람들의 감격스런 반응에 놀았다. 많은 남측 사람들에게 '친애하는 지도자는 더 이상 위협적인 존재가 아니었으며, 오히려 오랜 적대 끝에 관계를 개선하려고 하는 변덕스러운 천적으로 여겨졌다. 그것은 남북 태도의 엄청난 변화였으며, 이후 그것은 엄격히 통제된 것이기는 하지만 한국전쟁으로 뿔뿔이 흩어졌던 이산가족의 상봉, 남북 관리들 간의 접촉 확대, 그리고 평양에 대한 남한의 지원, 특히 식량과 비료의 지원으로 이어졌다.

 

워싱턴 또한 새롭게 눈을 떴다. 매들린 올브라이트는 2005년의 인터뷰 때 내게 "대개의 경우, 우리 정보는 김정일이 은둔자이며 광적이라고 말해왔다."고 말했다. 정상회담 바로 다음날 로버트 칼린은 상관인, 전 중국 주재 미국 대사이자 당시 국무부 정보조사국장인 스테이플튼 로이 Stepleton Roy가 올브라이트에게 제출할 정책 메모를 작성했다. 메모는 양김 회담이, 미국 정보 계통에서 널리 공유되고 있던 '친애하는 지도자'에 대한 견해, 즉 비합리적이고 비논리적이라는 견해를 깨뜨렸다고 주장했다.

 

게다가 칼린과 로이는, 김정일 정권이 과도한 수사와 선전에도 불구하고 놀라운 유연성을 보여줄 능력이 있음을 시사했다. 메모는 이렇게 적고 있다. "북한 사람들이 주변 강대국의 틈바구니에서 자주적이고 깐깐한 태도로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은, 정확히 이념적으로 엄격한 대외 정책을 갖고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오히려 그 반대로, (북한의) 대외 정책은 한반도 내부와 주변의 변화하는 환경에 반응해왔다.

 

이 같은 견해는 김대중이 서울에 돌아간 뒤 올브라이트와의 토론 자리에서도 확인됐다. "김 대통령은, 김정일은 충분히 상대할 수 있는 사람이며, 그가 합리적이며 해박한 지식의 소유자라고 내게 말해줬다." 올브라이트의 말이다.

 

또 다른 인터뷰에서 김대중은 말했다. "나는 김정일이 매우 똑똑한 인물이라는 인상을 받았다. (중략) 그리고 그는 세계 전반의 상황에 대해, 특히 한국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그는 다른 사람의 말을 경청했다. 그리고 그가 들은 말이 옳은 내용이면 그는 바로 그 말을 따랐다. 그러면서도 그는 즉석에서 다른 사람에게 의견을 묻지 않고서 스스로 결정을 낼리 줄도 알았다. 다른 측근이나 정부 관리와의 협의 없어도 그는 무엇이 옳고, 무엇이 그른지 그 자리에서 판단했다."

 

한국의 지도자는 김정일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그는 생존을 위한 유일한 선택은 미국과의 관계를 개선하는 것이라고 줄곳 이야기했다. 아울러 미국이 북한 정권의 생존을 보장한다면, 그리고 북한을 국제사회에 이끌어주면, 자기들은 핵무기이든 미사일이든 대량살상무기든 무엇이든, 모든 것을 포기할 것이라고 했다.

 

얼마 뒤, 클린턴 행정부는 적성국가교역법 Trading With the Enemy Act, TWEA에 의해 북한에 가했던 경제 제재 조치의 일부를 해제하기 시작했다. 동시에 평양은 이탈리아, 호주, 필리핀, 오스트리아, 캐나다, 영국, 그리고 독일과 관계를 확립하는 등 외교 공세를 계속 했다. 2000년 7월 러시아의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이 평양을 방문했을 때, 김정일은 만약 다른 나라가 북한 인공위성을 우주공간에 쏘아 올릴 수 잇게 도와주면 미사일 프로그램도 포기하겠다고 제안했다. 그 제안을 발표하면서 푸틴은 북한이 의미있는 위성 능력을 갖고 있지 못하며, 북한에 협력할 나라도 별로 많지 않다는 이유로 북한의 제안이 전적으로 비현실적으로 보인다고 말하면서도 상세한 설명은 별로 덧붙이지 않았다. 그러나 어쨌든 이같은 움직임은 평양이 미사일 프로그램을 미국과의 협상타결을 목표로 하는 일련의 과정에서 '바게닝 칩 bargaining chip'으로 이용할 뜻이 있다는 신호탄으로 비쳐졌다. 같은 해 7월 도쿄의 G8 정상회담에서, 러시아 지도자는 클린턴에게 방금 막 끝난 평양 방문에 대해 추가적인 내용을 귀띔해주었다.

 

평양의 정책우선순위에 대한 명백한 변화는 2000년 10월 12일, 5.1경기장의 놀라운 장관에도 깔려 있었다. 전체적인 연출의 이미지는 트렉터와 농민, 공장의 이미지에 압도되었다. 무용수들이 가축으로 분장해 경기장 바닥을 뛰어다니는 모습을 통해 북한이 던지려는 메시지는 한층 더 강조됐다. 하루 전, 나는 역시 '경애하는 지도자'가 참관했던 김일성광장의 퍼레이드에서도 유사한 메시지를 읽을 수 있었다. 북한판 로즈볼 Rose ball 퍼레이드를 방ㄹ물케 하는 군중 행렬에 꽃수레 행렬까지 이어졌다. (중략) 그러나 그것은 카드섹션과 마찬가지로 비단 나와 같은 기자를 통한 외부 세계 전달용일 뿐 아니라, 북한 주민을 향해서도 진지한 신호를 전하고 있었다. 김정일은 전 국민에게  감자를 재배할 것과, 더 나아가, 전쟁 준비가 아닌 경제 건설에 집중할 것을 독려하고 있었다. 이를 실현하자면 좀 더 우호적인 국제환경이 필요했을 것이며, 그것은 대미관계의 의미 있는 해빙에 의해서만 가능했을 것이다. 그리고 그 때 북한 권력 서열의 2인자는 워싱턴에서 새로운 역사를 만들어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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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자심근석

등록일2015-1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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