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양의 날씨는 몹시 추웠으며, 김일성광장에서 좀 떨어진 일종의 접근 금지 구역인 북한 외무성은 난방이 되지 않았다. 2007년 12월 5일, 미 국무부 동아시아 담당 차관보 크리스토퍼 힐은 추위에 몸을 떨며 흐릿한 불빛의 계단 4층을 힘들게 걸어올라 북한 외무상 박의춘의 집무실로 갔다. 넓지만 가구를 별로 들이지 않은 그의 방은 실내난방기로 겨우 온기를 유지하고 있었다.
힐은 봉투 하나를 꺼냈다. 박의춘은 자리에서 일어나 예의를 차린 뒤 손을 내밀어 봉투를 받았다. 힐이 그의 손에 봉투를 올려놓자 박의춘은 의도적으로 격식을 갖춘 어투로 다음과 같이 말했다. "본인은 미합중국 대통령 조지 W. 부시 각하가 우리나라 김정일 장군님께 보내는 친서를 접수하였습니다. 본인은 이 친서를 김정일 장군님께 정확하게 전달할 것입니다."
서한의 어조는 예의 바르고 정중했다. 이 펀지는 '친애하는 의장님'으로 시작해 '조지 W. 부시'라는 간단한, 그러나 손으로 직접 쓴 서명으로 끝났다. 김정일에게 있는 그대로의 정확한 내용이 전달될 것인지 믿지 못해 미국측이 작성한 번역문을 첨부한 이 친서에서, 부시 대통령은 북한에 미국과의 완전한 관계 정상화를 제안했다. 부시 대통령은, 이에 대한 대가로, 북한이 부시 대통령 임기 내내 미북 두나라를 위험한 적대 상황에 가둬놓았던 핵 프로그램을 완전 공개하고 폐기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혹독하게 추웠던 평양에서의 이날은 냉전의 마지막 남은 격렬한 분쟁 현장에 역사적 전환점이 됐다. 그러나 그것은 6년간에 걸친 불필요한 벼랑 끝 전술, 기회의 상실, 북한과 김정일을 핵 국가의 지위에 올려놓는 불행한 사태 끝에 찾아온 것이다. 게다가 항구적인 해결 방안에 대한 확신은 없는 채로였다.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났는가?
조지 W. 부시는 스스로 인정했다시피 김정일을 '혐오'했다. 이 감정은 개인적이고, 본능적이었으며, 정치적 판단을 초월하는 것이었다. 부시는 북한에서는 '경애하는 지도자'로 알려진 사람을 칭하기 위해 '피그미', '폭군', '위험한 사람', 그리고 '버릇 없는 아이' 등의 표현을 다양한 자리에서 사용했다. 그리고 가장 기억에 선한 것은, 부시가 이란, 이라크와 더불어 북한을 '악의 축'에 포함시켰던 경우다.
부시 대통령은 임기 내내, 김정일 같은 사람과 협상하는 것은 세계에서 가장 위험하고 비인간적인 정권의 존재를 정당화하거나 혹은 수명을 연장시키는 것을 뜻하므로 도덕적이지 못하다고 믿는 신보수파(네오콘) 강경파들과 제휴했다. 화해를 이루려는 전임 클린턴 행정부의 노력은, 경제적 외교적 편익을 대가로 북한이 초보적인 단계의 핵 프로그램을 포기하는 것을 주요 내용으로 한 1994년의 타협을 성사시켰으며, 김정일과의 정상회담을 위해 클린턴이 거의 평양을 방문할 뻔하기도 했으나, 미국 내 강경파들에 의해 '유화 정책'으로 매도되었다.
그 대신, '불량 국가'의 정권 교체를 촉진하기 위한 부시 행정부의 9.11 이후 선제공격 원칙 아래서, 미국은 혹심한 경제 및 외교 압력을 통해 김정일을 무너뜨리려고 하는 한편, 군사 행동이라는 궁극적인 위협을 논의 테이블에 올려놓으려고 했다. 북한의 거듭된 대화 요구에도 불구하고, 미 행정부는 5년 이상 의미 있는 양자 협상에 관여하기를 거부했다. 또 외교 접촉이 있을 때마다 벌어진 일은 위협과 신랄한 비난, 그리고 양측 관계에 대한 계산된 홀대였다. 미국 외교관들은 워싱턴의 고위 관리로부터 절대로 북한 측과 같은 방에 있거나 주고받기식 토론에 끼어들지 말라고 지시 받았다.
이런 일들이 벌어지는 동안, 미국은 이라크를 침공하여 사담 후세인을 축출했으며, 대량살상무기를 생산하려고 하는 다른 적대 정권은 후세인의 운명을 교훈으로 삼아야 한다고 요란스럽게 선전했다.
당시 국부무 군축 담당 차관 존 볼턴은 "대량살상무기를 추구함으로써 미국의 이ㅐ에 반하는 행동을 하는 이란, 북한, 시리아, 리비아 등의 불량 국가들은 그들의 비밀 프로그램이 결코 추적망이나 엄중한 후과를 빠져나갈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될 것이다."라고 말한 바 이다.
그러나 일반의 통념과는 정반대로, 미치지도 이성을 잃지도 않았으며, 새로운 전략적 합종연횡이 벌어졌던 탈냉전 세계에서 핵심 목표는 항상 정권의 생존이라고 믿고 있던 북한의 김정일은 정반대의 결론을 내렸다. 그의 관점에서는, 핵무장이야말로 사담 후세인과 운명을 함께하지 않을 수 있는 최선의, 아니 유일한 길이었던 것이다. 미국의 거센 압박에 직면해 김정일은 핵실험을 진행했고, 핵 동결을 중지했으며. 영변 핵시설에서 국제 사찰관들을 추방하고, 원자로를 재가동했으며, 일각의 예측에 의하면 6개에서 10개에 이르는 핵폭탄을 제조할 수 있는 양의 무기급 플로토늄을 생산했다.
북한은 만약 부시 행정부가 평양에 말하는 '적대시 정책'을 끝내지 않으면, 핵 '억지력'을 계속해서 강화해나갈 것이라고 일관되게 경고했다. 2006년 11월, 김정일은 자신의 위협을 실천에 옮겼다. 미국, 일본, 한국, 러시아, 그리고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및 국제사회의 경제적 압박과 외교적 요구에 맞서, 북한은 극심한 식량난, 경제 붕괴, 그리고 국제적 고리에도 불구하고, 지하 핵실험을 강행했으며 세계에서 여덟 번째 핵 국가가 되었다. 부시 행정부의 최악의 우려, 즉 핵을 획득한 '불량 국가'가 현실이 되고 만 것이다.
북한과 같은 나라가 대량살상무기를 손에 넣지 못하게 막는 것을 핵심으로 하는 외교 정책을 펼쳤던 부시 행정부가 어떻게, 비밀스럽고 고립된 정권이 핵무기를 보유하는 것을 막을 수 없었는가가 이 책의 주제다. 그것은 북한이라는 나라를 넘어서는 미국 외교 정책 전반의 실패에 관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국제 비확산 체제의 붕괴, 이른바 불량 국가의 핵 야망에 대응하는 과제, 한국과 일본 등 미국의 핵심 동맹 간계의 파탄, 아시아 지역 내 미국 입지의 잠식, 주요 행위자로서 중국의 국제무대 등장, 그리고 정보의 정치 조작 등이 바로 그런 주젣.
무엇보다도 이 책은 내부 투쟁, 비일관성, 그리고 외교적 무능으로 통칭되는 대북 정책을 펼친 미국 행정부에 관한 이야기이다. 부시 행정부 재임 중 상당 기간 대북 정책은, 체니 부통령, 반확산 정책 입안자로서 로버트 조지프와 존 볼턴, 도널드 럼스펠드 국방장관과 그들의 협력자들이 포함된 강경 보수파와, 콜린 파월 국무장관과 그의 차석 리처드 아미티지, 그리고 훗날의 콘돌리자 라이스와 그의 협상 대표 크리스토퍼 힐 등 대북 관여 정책을 지지했던 사람들 간의 격심한 투쟁에 의해 마비되었다. 관여 정책 찬성파는 또한 국무부의 아시아/한국 전문가들을 포함했다. 다양한 경우를 통해 양측은 각기 자기네들이 대통령의 지지를 얻고 있다고 확신했다.
이같은 혼란과 갈등은 부분적으로는 대북 문제를 둘러싼 부시 대통령 자신의 머리와 가슴 간의 투쟁이기도 했다. 흑백논리의 세계관을 갖고 고통을 겪는 북한 인민들에게 동정심을 느끼며, 큰 몽둥이를 휘두르기를 좋아했던 대통령은, 본능적으론느 강경파의 편을 들었다. 하지만 강경파가 우세했을 때, 미국의 대북 정책 결정은 도덕적인 분노, 대결적인 수사, 군사적인 무력 시위, 그리고 미묘한 외술과 클린턴 행정부가 성취하고자 했던 모든 것에 대한 경멸이 혼합된 것이었다.
이런 점에서 이라크 실패의 반향은 일부 왜곡이 있기는 하지만 매우 분명하다. 부시는 이라크의 독쟂 사담 후세인의 대량살상무기, 특히 핵무기 추구가 미국의 이해를 위협한다는 믿음으로 그의 축출을 정당화했다. 물론 사담 후세인은 그런 무기를 가진 바 없었으며, 미국의 정보기관들은 이라크 침공을 정당화하고자 했던 행정부 내 가경파의 정치적 압력 아래 그런 평가를 내렸던 것으로 밝혀졌다.
북한의 경우, 핵 프로그램의 존재는 잘 알려져 있었고, 김정일은 핵폭탄을 만들기 위해 이런저런 시도를 하고 있다는 사시을 굳이 감추지도 았았다. 더우이, 북한이 고농축 우라늄으로 핵무기를 만드는 프로그램의 일부 요소를 획득하려 애썼음을 보여주는 미국 측 첩보의 정확도에도 별 의문이 없었다. 그러나 심지어는 이라크 관련 정보의 대실패 이후에도, 미국 측 대북 정보 또한 정치화되었고, 대북 대결을 추구했던 사람들은 핵무기의 획득 시도와 실제 제조 사이의 차이점을 흐렸으며, 북한이 우라늄 폭탄응ㄹ 완성하는 데까지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고 따라서 더 위협적이라고 경고했다.
그러나 이라크와는 매우 대조적으로, 부시 행정부는 김정일 핵실험을 추구하고 있었음에도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 북한은 '금지선(red line)'을 반복해서 넘었다. 사용후 연료봉을 무기급 플로토늄으로 재처리하는가 하면, 핵 국가를 선언하기도 했고, 실제로 클린턴 시절 같았으면 군사 행동을 촉발시켰을 수도 있는 핵실험을 감행하기도 했던 것이다. 평양이 요구하던 직접 협상을 배제시키면서 부시 행정부는 자신의 거친 수사적 표현을 행동으로 뒷받침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한 냉소적인 평자는 부시의 대북 정책을. '대화도, 당근도, 채찍도 없는 정책'이라고 칭하기도 했다.
부시 행정부의 이라크 '올인'은 거친 언사만 있고 행동은 없었던 데 대해 한 가지 설명 근거를 제공해 준다. 또 다른 설명은, 북한의 곤경에 대한 감정적 반응이 아무리 강했던 손 치더라도, 이와 동시에 조지 W. 부시는 최종적으로 북한과의 대결 지속이 한국, 일본 등 아시아의 핵심 동맹국들은 물론, 날로 영향력이 커지고 있는 중국과의 관계에도 부정적인 영향을 주고 있음을 인식했다. 더욱이 미국의 위협에도 불구하고, 클린턴 시대에서부터 이미 위험 투성이였던 군사적 옵션은 북한의 핵 병기가 성장함에 따라 더욱더 구미에 맞지 않는 옵션이 되어버린 상태였다. 미국은 북한이 이미 제조한 새 폭탄을 어디에 은닉하고 있는지 알지 못했다. 또 미국의 선제 공격은 서울에 대한 북측의 대규모 보복 타격, 일본으로의 미사일 발사, 그리고 동북아 모든 국가들의 격렬한 반대를 야기할 위험성도 있었다.
부시의 한 전직 고위 측근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김정일이 자신의 국민을 대하는 방식에 대헤서는 매우 본능적인 느낌을 가질 수 있다. 그러나 부시 대통령 머리의 나머지 반쪽은, "우리는 이 문제를 해결해야 만 한다. 문제를 풀기 위해 외교적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면, 우리는 그렇게 할 것이다."라고 말하고 있었다."
제재와 강제의 위협은 비효율적이며, 군사적 옵션은 미국이 이미 이라크와 아프카니스탄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바로 그때 제2의 한국전을 일으킬 가능성까지 있는 상황에, 부시 행정부는 협상 이외에는 실질적인 대안을 갖고 있지 못했다. 대통령은 내키지 않는 심정으로 외교적인 주고받기야말로 상황을 진전시킬 유일한 길이라고 주장한 크리스토퍼 힐과 콘돌리자 라이스의 조언을 따를 수밖에 없었다. 이를 위해서는 지구상에서 가장 전제적인 정권과의 불편한 타협이 불가피했던 것이다. 이과 같은 전면적인 정책 전환은 2007년 12월 힐의 평양 방문에서 절정에 올랐다.
조지 W. 부시가 취임할 당시, 북한의 핵 프로그램은 동결 상태였으며 김정일은 기껏해야 1개 내지 2개의 핵폭탄을 만들 수 있는 무기급 플로토늄을 보유하고 있었다. 그러나 부시가 김정일에게 친서를 써보낼 무렵, 북한은 지하 핵실험을 실시하고, 많으면 10개까지 핵탄두를 제조할 수 있는 분열 물질을 보유하고 있었을 뿐 아니라, 최악의 경우, 핵 관련 노하우나 분열 물질을 테러 집단에게 제공할 수 있을 정도로 성숙한 핵 국가가 되어 있었다. 북한은 원칙적으로는 적정한 보상이 따를 경우 완전 비핵화를 위해 협상할 준비가 되어 있다고 주장했지만, 그럼에도 평양 정권이 진실로 핵 협상 타결을 위해 핵무기를 거래할 용의가 있는지는 여전히 분명하지 않아다.
핵이 없는 북한은 그저 또 하나의 궁핍한 제3세계 독재국가일 뿐이었다. 핵무기를 보유함으로써 김정일은 공산주의가 거의 세계 모든 곳에서 붕괴된 이후 20년 가까이, 세계 최강의 초강대국에 성공적으로 맞설 수 있었으며, 자신의 전제적 체제를 계속 굴러가게 할 수 있었다.
2008년이 밝으면서 미국 외교의 도전은, 조지 부시의 미래 외교 관계(정상화) 다짐이 과연 북한으로 하여금 근본적인 전략적 변화를 촉발할 수 있을 것인가였다. 이와 똑같은 의문이 클린턴 행정부 말기에도 있었다. 그러나 부시 행정부 초기 더욱 대겨럭인 방향으로 돌아선 미국의 돌연한 정책 변화는 북한이 걸핏하면 말하는 비핵화 용의가 의미 있고, 솔직한 협상을 통해 검증될 기회를 결코 얻지 못했음을 뜻했다. 아제 마침내, 조지 W. 부시는 김정일의 의도를 시험하기로 했다. 이 책에 기록된 바 숱한 롤러코스터 타기 식 사건을 거친 오늘날, 미국 정책의 변화가 조지 W. 부시가 취임했을 때보다 훨씬 더 광범위하고 위험해진 북한의 핵 프로그램을 격퇴시키기에 너무 늦은 것인지는 아직도 불분명하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