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의 핵위기는 롤러코스트 타기를 연상시킨다. 새로운 갈등과 전쟁의 공포를향한 머리칼이 곤두서는 하강의 끊임없는 연속, 그에 뒤이은 화해를 향한,보통 막판에 벌어지곤하는 극적인 상승, 그리고 좀 안도의 한숨을 내쉴 때쯤이면 또다시 벌어지는 급전직하의 상황이 바로 그것이다.
북한은 무엇을 원하는가? 북한은 붕괴할 것인가? 김정일, 그리고 누구든 그를 승계할 사람의 머릿
속에 든 생각은 무엇인가? 북한을 설득해 핵프로그램을 포기시킬 기회는 있는가? 지난10년간 그럴 가능성이 흐지부지된 것은 과연 조지 W. 부시의 적대적인 정책 탓이었는가? 평양으로 하여금 방향을 바꾸도록 할 좀더 효과적인 방안은 무엇인가?
재제와 압력인가, 아니면 대화와 관여인가? 그동안 계속되어온 위기는 한미 안보 동맹, 그리고 서울과 워싱턴, 도쿄 사이의 중대한 삼각관계에 어떤 영향을 끼쳐왔는가? 한반도에 대한 중국의 핵심 이해는 무엇이며, 페이징이 행해온, 또는 장래에 행할 수 있는 역할은 무엇인가? 이 모든 나라들의 국내 정치는 북한 문제에 대한 정책 결정을 어느 정도 좌우해왔는가? 그리고 마지막으로, 이 같은 의문에 대한 답을 찾을 때 개인의 성격, 야망, 이념적인 확신, 권력투쟁 등은 어떻게 작용해왔는가?
물론 핵위기의 그림자는 다른 어떤 나라보다도 남북한 양측의 국민들에게 훨씬 더 짙게 드리워져있다.
2009년의 사건들은 왜 나의 롤러코스터의 비유가 딱 들어맞는지를 생생하게 보여주고 있다. 지난 4월에는 장거리 미사일 실험이 있었고, 5월에는 북한의 두번째 핵실험이 이어졌으며, 핵무기를 포기하지않을 것이며 앞으로는 핵국가로 대접받고야 말겠다는 직설적인 발표가 잇달았다.
그너나 여름이 끝날 무렵, 분위기는 극적으로 변했다. 투옥된 미국 기자 두 명을 석방시키기 위한, 그리고 김정일과의 회담으로 절정에 올랐던 전 미국 대통령 빌 클린턴의 8윌초 평양 방문은 혹자가 말하는 '구애 공세'의 최초 신호였다. 김정일이 미국과
관계하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다는 분명한 신호였던 것이다.
이 사건에 뒤이어 남북 사이에도 마찬가지로 중대한 긴장 완화가 이어졌다. 이이러니컬하게도, 그것은 남북화해시도를 선구적으로 개척해왔던 인물 김대중의 마지막 공헌이었다. 2009년 8월 18일 이 전직 대통령의 죽음은 김정일이 북측의 애도를 표하기 위해 서울에 고위급 조문단을 보내는 계기를 제공했다. 조문단에는 대남사업의 핵심인물이자 북한 정보 책임자인 김양건, 그리고 의미심장하게도 김정일-클린턴 만찬에 참석했던 북한 노동당비서인 김기남이 포함되었다. 북측은 청와대에서 이명박 대통령을 만났으며, 남한의 지도자는 관계 개선의 희망을 재차 피력하고, 북측 방문객들에게 북한을 돕고자하는 자신의 개인적 희망을 김정일에게 전달해달라고 부탁했다. 이 접견은 김대중대통령의 서거 직전 현대그룹 현정은 회장에 의한 평양방문을 포함해 평앙이 취한 몇 가지 조치에 이은 것이며. 앞서 3월부터 북한에 억류되었던 현대 직원의 석방을 보장해주기도 했다. 북한은 이전까지 폐쇄했던 분계선 통과를 다시 허용했으며 양측 적십자사 대표들은 10월 중 남북이산가족 상봉을 재개하기로 합의했다.
이와 동시에 8월말 치르진 선거에서 일본 민주당의 극적인 승리는, 일본 하토야마 유키오 총리의 새 정부가 그의 전임자들보다 북한에 훨씬 더 창의적으로 접근할지 모른다는 추측과 더불어, 북한과 일본간 오랜 냉각 관계의 해빙을 가져올 것이라는 전망을 불러일으켰다.
긴장은 누그러지고 있지만 많은 문제들은 그대로 남아있다. 그 중 핵심적인 문제는 '구애 공세'가 평양의 접근 양식의 진정한 변화를 뜻하는 것인지, 아니면 단순히 증가하는 국제적 압력을 무디게 하기 위힐 북한 정권의 전술적인 움직임에 불과한 것인지를 분명히 하는 것이었다. 북한을 연구하는 분석가들의 입장은 갈렸다. 일부 분석가들은 일단 지난 겨울과 올 봄 사이 협상에서의 입지를 강화하기 위한 힘자랑이 끝난 이상 북한이 회담에 다시 돌아올 것이라고 주장했다. 다른 분석가들은, 그 변화는 자신의 도발적인 행동이 오히려 역풍을 불러일으켰다는 김정일의 인식을 반영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북한에 좀 더 좋은 조건으로 관여하도록 오바마 정부에 압박을 가한 것은 오히려 대선 때 옛 적대국에 화해의 손길을 내밀겠다고 공약한 바 있었던 새대통령을 소외시켰다. 더욱이 오랫동안 북한에 대한 압박 수위를 높이는데 찬성하기를 꺼려왔던 중국은 새로운 유엔 강경 제재에 동의한 바 있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평양은 스스로 제 무덤을 파고 있었을 뿐이다.
북한 측의 화해 신호를 핵국가로 인정받겠다는 희망을 버린 것으로 해석해도 좋을 증거는 확실히 별로 없다. 이는 가장 근본적인 문제를 제기했다. 북한이 재개된 협상의 핵심 주제로 비핵화를 상정할 준비가 되어 있다면, 그리고 회담 형식과 양자 대 다자 교류, 그리고 다른 절차적 문제들이 마련될 수 있다면, 그 다음은 무엇을 가지고 토론을 할 것인가?
바로 이 같은 상황아래서, 한국과 미국의 정책 결정자들이 과거 10년간 위기가 전개될 때마다 주기적으로 제기됐던 문제들을 놓고 새롭게 씨름했다. 2012년까지 전시작전권OPCON을 이양하려는 미국의 계획도 그 중 하나였다. 고 노무현대통령의 좌파 성향 정부에 의해 주도되었고 부시 행정부가 얼마간의 불쾌감 속에 동의했던 이 계획에 대해서는, 일부 전작권 이양 찬성론자들조차 2009년 초반의 긴장 상황과 북한의 의도가 분명치않다는 관점에서 당초와는 다른 생각을 갖기 시작했다. 동맹의 지위에 대해 북한에 그릇된 신호를 보내지않는 방향으로 움직여야 한다는 것이 갈수록 중요한 관심사가 됐다.
한국을 보호하고 있는 미국의 핵우산 문제도 마찬가지였다. 2009년 상반기 중 북한에서 나온 호전적 발언들 가운데는, 미국이 더 이상 그런 핵우산을 제공하지 말 것과, 핵우산이 철회되어야만 평양이 자신의 핵무기 포기를 고려하게 될 것이라는 요구도 있었다. 이에 대한 대응으로, 이명박 대통령은 2009년 9월 워싱턴에서 열린 정상회담에서, 북한이 남한을 공격할 경우 미국의 핵우산 제공을 문서로 보장해 달라고 요청했으며 오바마 대통령은 이에 동의했다. 문서화된 공동성명에서, 미국측은 "양국민의 안보 이해를 지켜줄 동맹 능력에 의해 지탱되는 강력한 방위태세를 유지할 것이며, 미국의 핵우산을 포함해 연장된 억지력에 대한 지속적인 공약을 통해 이와 같은 다짐을 강화해나갈 것"을 약속했다. 미국 대통령이 핵무기의 사용을 승인할 것인지,
한다면 언제 할 것인지 등 엄청나게 민감한 문제에 대해 그처럼 명확하게 보증해준 것은 처음이었다.
2009년 하반기까지, 그와 같은 공약이 작성되던 시기의 위기상황은 누그러졌지만, 서울과 워싱턴의 군사 정책 입안자들에게는 원칙에 대한 포괄적 표현들을 어떻게 구체적으로 현실화할 것인가하는 문제가 남았다. 즉, 과연 어떤 조건에서 미국이 실제로 공약을 실천할 것인가, 어떻게 그와 같은 결정이 내려져야 하는가 따위이다.
1978년 내가 한국을 처음 방문했을 때, 가장 큰 충격은 서울 한복판 밑으로 난 지하도, 수도에서의 통금시간 지속, 비무장지대로 가는 길의 대전차 장애물, 그리고 전국 어디에서나 찾아볼 수 있는 포위 심리였다. 그 포위 심리란 위협적인 북한이 하시라도 기습할 수 있으며, 미국의 대규모 군사주둔이 이 같은 공격을 막는데 핵심이라는 애간장 녹이는 걱정이었다.
그로부터 11년 뒤인 1989년 북한을 찾았을 때, 놀라운 감정은 남한에서 얻은 인상과 거꾸로였다. 미군으로부터 위협을 느끼고 이에 맞서정규적으로 하는 공습 대비 훈련, 극단적인 단체훈련, 그리고 거친 선전 문구를 동원하는 평양이었다. 상호 불신의 규모, 상호 이해의 격차, 상호 신뢰의 결여는 절대적이었다.
한반도를 처음 방문한 지 30년이 된 지금, 냉전의 가장 초기로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분쟁이, 수많은 나라의 수많은 사람들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지속되고 있으며, 이를 해소하기 위해 해야 할 일이 아직도 많이 남았다는 것은 상상하기 어렵다. 한빈도가 둘로 갈라졌을 때 또는 한국전쟁이 발발했을 때는 어린아이들이었거나 아니면 아직 태어나지도 않았던 정치 지도자들은 21세기에 들어서도 여전히 그 후과들과 사투를 벌이고 있다. 내가 이 책의 한국어판 서문을 쓰고 있는 바로 지금도 한반도의 통일은 물론 북한의 비핵화에 대한 전망마저 현실과 동떨어져 보인다. 이 책에서 되돌아본 이야기는 아직 끝나지 않았으며, 다음과 같은 가장 곤혹스런 질문을 포함하여 새로운 도전만 있을 뿐이다. 자신의 야심과 전 부시 행정부의 무능으로 인해 핵국가로 전환하는데 성공한 북한을 과연 어떻게 해야하는가?
캘리포니아 아카디아에서
마이크 치노이
2009년 9월
북한은 무엇을 원하는가? 북한은 붕괴할 것인가? 김정일, 그리고 누구든 그를 승계할 사람의 머릿
속에 든 생각은 무엇인가? 북한을 설득해 핵프로그램을 포기시킬 기회는 있는가? 지난10년간 그럴 가능성이 흐지부지된 것은 과연 조지 W. 부시의 적대적인 정책 탓이었는가? 평양으로 하여금 방향을 바꾸도록 할 좀더 효과적인 방안은 무엇인가?
재제와 압력인가, 아니면 대화와 관여인가? 그동안 계속되어온 위기는 한미 안보 동맹, 그리고 서울과 워싱턴, 도쿄 사이의 중대한 삼각관계에 어떤 영향을 끼쳐왔는가? 한반도에 대한 중국의 핵심 이해는 무엇이며, 페이징이 행해온, 또는 장래에 행할 수 있는 역할은 무엇인가? 이 모든 나라들의 국내 정치는 북한 문제에 대한 정책 결정을 어느 정도 좌우해왔는가? 그리고 마지막으로, 이 같은 의문에 대한 답을 찾을 때 개인의 성격, 야망, 이념적인 확신, 권력투쟁 등은 어떻게 작용해왔는가?
물론 핵위기의 그림자는 다른 어떤 나라보다도 남북한 양측의 국민들에게 훨씬 더 짙게 드리워져있다.
2009년의 사건들은 왜 나의 롤러코스터의 비유가 딱 들어맞는지를 생생하게 보여주고 있다. 지난 4월에는 장거리 미사일 실험이 있었고, 5월에는 북한의 두번째 핵실험이 이어졌으며, 핵무기를 포기하지않을 것이며 앞으로는 핵국가로 대접받고야 말겠다는 직설적인 발표가 잇달았다.
그너나 여름이 끝날 무렵, 분위기는 극적으로 변했다. 투옥된 미국 기자 두 명을 석방시키기 위한, 그리고 김정일과의 회담으로 절정에 올랐던 전 미국 대통령 빌 클린턴의 8윌초 평양 방문은 혹자가 말하는 '구애 공세'의 최초 신호였다. 김정일이 미국과
관계하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다는 분명한 신호였던 것이다.
이 사건에 뒤이어 남북 사이에도 마찬가지로 중대한 긴장 완화가 이어졌다. 이이러니컬하게도, 그것은 남북화해시도를 선구적으로 개척해왔던 인물 김대중의 마지막 공헌이었다. 2009년 8월 18일 이 전직 대통령의 죽음은 김정일이 북측의 애도를 표하기 위해 서울에 고위급 조문단을 보내는 계기를 제공했다. 조문단에는 대남사업의 핵심인물이자 북한 정보 책임자인 김양건, 그리고 의미심장하게도 김정일-클린턴 만찬에 참석했던 북한 노동당비서인 김기남이 포함되었다. 북측은 청와대에서 이명박 대통령을 만났으며, 남한의 지도자는 관계 개선의 희망을 재차 피력하고, 북측 방문객들에게 북한을 돕고자하는 자신의 개인적 희망을 김정일에게 전달해달라고 부탁했다. 이 접견은 김대중대통령의 서거 직전 현대그룹 현정은 회장에 의한 평양방문을 포함해 평앙이 취한 몇 가지 조치에 이은 것이며. 앞서 3월부터 북한에 억류되었던 현대 직원의 석방을 보장해주기도 했다. 북한은 이전까지 폐쇄했던 분계선 통과를 다시 허용했으며 양측 적십자사 대표들은 10월 중 남북이산가족 상봉을 재개하기로 합의했다.
이와 동시에 8월말 치르진 선거에서 일본 민주당의 극적인 승리는, 일본 하토야마 유키오 총리의 새 정부가 그의 전임자들보다 북한에 훨씬 더 창의적으로 접근할지 모른다는 추측과 더불어, 북한과 일본간 오랜 냉각 관계의 해빙을 가져올 것이라는 전망을 불러일으켰다.
긴장은 누그러지고 있지만 많은 문제들은 그대로 남아있다. 그 중 핵심적인 문제는 '구애 공세'가 평양의 접근 양식의 진정한 변화를 뜻하는 것인지, 아니면 단순히 증가하는 국제적 압력을 무디게 하기 위힐 북한 정권의 전술적인 움직임에 불과한 것인지를 분명히 하는 것이었다. 북한을 연구하는 분석가들의 입장은 갈렸다. 일부 분석가들은 일단 지난 겨울과 올 봄 사이 협상에서의 입지를 강화하기 위한 힘자랑이 끝난 이상 북한이 회담에 다시 돌아올 것이라고 주장했다. 다른 분석가들은, 그 변화는 자신의 도발적인 행동이 오히려 역풍을 불러일으켰다는 김정일의 인식을 반영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북한에 좀 더 좋은 조건으로 관여하도록 오바마 정부에 압박을 가한 것은 오히려 대선 때 옛 적대국에 화해의 손길을 내밀겠다고 공약한 바 있었던 새대통령을 소외시켰다. 더욱이 오랫동안 북한에 대한 압박 수위를 높이는데 찬성하기를 꺼려왔던 중국은 새로운 유엔 강경 제재에 동의한 바 있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평양은 스스로 제 무덤을 파고 있었을 뿐이다.
북한 측의 화해 신호를 핵국가로 인정받겠다는 희망을 버린 것으로 해석해도 좋을 증거는 확실히 별로 없다. 이는 가장 근본적인 문제를 제기했다. 북한이 재개된 협상의 핵심 주제로 비핵화를 상정할 준비가 되어 있다면, 그리고 회담 형식과 양자 대 다자 교류, 그리고 다른 절차적 문제들이 마련될 수 있다면, 그 다음은 무엇을 가지고 토론을 할 것인가?
바로 이 같은 상황아래서, 한국과 미국의 정책 결정자들이 과거 10년간 위기가 전개될 때마다 주기적으로 제기됐던 문제들을 놓고 새롭게 씨름했다. 2012년까지 전시작전권OPCON을 이양하려는 미국의 계획도 그 중 하나였다. 고 노무현대통령의 좌파 성향 정부에 의해 주도되었고 부시 행정부가 얼마간의 불쾌감 속에 동의했던 이 계획에 대해서는, 일부 전작권 이양 찬성론자들조차 2009년 초반의 긴장 상황과 북한의 의도가 분명치않다는 관점에서 당초와는 다른 생각을 갖기 시작했다. 동맹의 지위에 대해 북한에 그릇된 신호를 보내지않는 방향으로 움직여야 한다는 것이 갈수록 중요한 관심사가 됐다.
한국을 보호하고 있는 미국의 핵우산 문제도 마찬가지였다. 2009년 상반기 중 북한에서 나온 호전적 발언들 가운데는, 미국이 더 이상 그런 핵우산을 제공하지 말 것과, 핵우산이 철회되어야만 평양이 자신의 핵무기 포기를 고려하게 될 것이라는 요구도 있었다. 이에 대한 대응으로, 이명박 대통령은 2009년 9월 워싱턴에서 열린 정상회담에서, 북한이 남한을 공격할 경우 미국의 핵우산 제공을 문서로 보장해 달라고 요청했으며 오바마 대통령은 이에 동의했다. 문서화된 공동성명에서, 미국측은 "양국민의 안보 이해를 지켜줄 동맹 능력에 의해 지탱되는 강력한 방위태세를 유지할 것이며, 미국의 핵우산을 포함해 연장된 억지력에 대한 지속적인 공약을 통해 이와 같은 다짐을 강화해나갈 것"을 약속했다. 미국 대통령이 핵무기의 사용을 승인할 것인지,
한다면 언제 할 것인지 등 엄청나게 민감한 문제에 대해 그처럼 명확하게 보증해준 것은 처음이었다.
2009년 하반기까지, 그와 같은 공약이 작성되던 시기의 위기상황은 누그러졌지만, 서울과 워싱턴의 군사 정책 입안자들에게는 원칙에 대한 포괄적 표현들을 어떻게 구체적으로 현실화할 것인가하는 문제가 남았다. 즉, 과연 어떤 조건에서 미국이 실제로 공약을 실천할 것인가, 어떻게 그와 같은 결정이 내려져야 하는가 따위이다.
1978년 내가 한국을 처음 방문했을 때, 가장 큰 충격은 서울 한복판 밑으로 난 지하도, 수도에서의 통금시간 지속, 비무장지대로 가는 길의 대전차 장애물, 그리고 전국 어디에서나 찾아볼 수 있는 포위 심리였다. 그 포위 심리란 위협적인 북한이 하시라도 기습할 수 있으며, 미국의 대규모 군사주둔이 이 같은 공격을 막는데 핵심이라는 애간장 녹이는 걱정이었다.
그로부터 11년 뒤인 1989년 북한을 찾았을 때, 놀라운 감정은 남한에서 얻은 인상과 거꾸로였다. 미군으로부터 위협을 느끼고 이에 맞서정규적으로 하는 공습 대비 훈련, 극단적인 단체훈련, 그리고 거친 선전 문구를 동원하는 평양이었다. 상호 불신의 규모, 상호 이해의 격차, 상호 신뢰의 결여는 절대적이었다.
한반도를 처음 방문한 지 30년이 된 지금, 냉전의 가장 초기로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분쟁이, 수많은 나라의 수많은 사람들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지속되고 있으며, 이를 해소하기 위해 해야 할 일이 아직도 많이 남았다는 것은 상상하기 어렵다. 한빈도가 둘로 갈라졌을 때 또는 한국전쟁이 발발했을 때는 어린아이들이었거나 아니면 아직 태어나지도 않았던 정치 지도자들은 21세기에 들어서도 여전히 그 후과들과 사투를 벌이고 있다. 내가 이 책의 한국어판 서문을 쓰고 있는 바로 지금도 한반도의 통일은 물론 북한의 비핵화에 대한 전망마저 현실과 동떨어져 보인다. 이 책에서 되돌아본 이야기는 아직 끝나지 않았으며, 다음과 같은 가장 곤혹스런 질문을 포함하여 새로운 도전만 있을 뿐이다. 자신의 야심과 전 부시 행정부의 무능으로 인해 핵국가로 전환하는데 성공한 북한을 과연 어떻게 해야하는가?
캘리포니아 아카디아에서
마이크 치노이
2009년 9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