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장
북한의 정권 교체?
2013년 3월 김대중 대통령, 부시와 정상회담을 갖다.
부시가 김대통령을 "이 양반 this man"이라고 부르다
조지 부시가 취임하면서 북한 외교관들은 새 행정부와 대화를 재개하고 싶다는 의사를 표시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2월8일 워싱텅의 대서양위원회가 조직한 한 회의에서, 북한의 유엔 대표부 상근 부대표인 리근은 미국의 북한 전문가들에게 "이제 행동으로 옮길 때다. 우리는 부시 행정부가 대북 관여 정책을 유지하기를 희망한다."라고 말했다.
북한 대표들은 허버드에게, 결국 클린턴과 조명록이 '적대적 의사를 갖지 않을 것 no hostile intent'을 다짐한 공동성명이 있지 않느냐고 말했다. 허버드는 북한 손님들이 공동성명을 '복음'으로 여겼다고 술회했다. 공동성명이 있는 한, 그들은 워싱턴과의 관계가 제대로 굴러갈 것이라고 자신하는 듯 했다.
로버트 조지프는 화해와 관여 정책에는 별 관심이 없었다. 미국 국방부대학의 반확산센터 소장이었으며 과거 레이건 행정부와 아버지 부시 정부에서 국방 부차관보를 역임했던 조지프는 오랜 국방 분야 매파로서 군축 협정의 가치에 대해 회의적이엇던 반면, 잠재적인 적대국을 억제하기 위한 강력한 대외 정책에0 심취되어 있었다. 그는 북한이 20세개의 가장 잔인하고 억압적인 정권이라고 믿었으며, 메들린 올브라이트의 평양행을 못마땅한 심정으로 지켜보았다.
부시 정권 출범 때 국무부의 정책기획실 Office of Policy Planning에서 일했으며 2002년 콜린 파월의 비서실장에 된 로렌스 윌커슨 Lawrence Wilkerson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조지프는 기본 합의를 진짜 싫어했다. 그는 기본 합의를 지금까지 작성했던 (미국의) 외교 문서 쓰레기들 가운데에서도 단연 최악이라고 생각했다. (중략) 따라서 그의 목표는 가장 먼저 기본 합의를 폐기하는 것이었고 그와 같은 문서가 다시는 작성되지 않도록 단단히 단속하는 것이었다."
파월이 대북 관여 정책 비판 그룹과 비교해 수적으로 열세에 놓였음은 이 회의에서 금방 확연해졌다. 허버드가 우려했던 바대로, 회의 결과는 두 개 실무 그룹을 설치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허버드는 한국 실무 그룹을 관장하고, 조지프는 확산 문제를 다루는 그룹을 관장하게 됐다. 안보부보좌관 스티븐 해들리는 국가안보회의가 정책 검토 기간 중 '사무국' 기능을 담당한다는 내용의 지시를 내렸다. 허버드는 이 지시를 주로 회의록 작성, 또는 각 부처의 입장 표명 회담 따위 행정적 기능에 관한 사항으로 이해했다. 하지만 국가안보회의는 다른 생각이었다. 사무국은 매파들이 전 과정을 통제할 수 있게금 보장하면서, 모든 서류를 결재할 권한을 장악했다.
조지프와 허버드는 처음부터 충돌했다. 허버드에게, 조지프는 네오콘과 밀접한 관계를 갖는 이념론자이자, 클린턴식이면 무조건 질색하고 보는 성향의 인물로 비쳐졌다. 한편 조지프로서는, 허버드가 두 사람 간의 첫 대화에서, "대통령만 이 문제를 이해한다면"이라고 말하며, 부시에 대한 당혹감을 표현한 것에 충격을 받았다. 조지프의 생각에 그런 테도는 그가 매우 싫어하는, 직업외교관들에게 전형적으로 나타나는 오만함에 다름 아니었다.
공동성명 문제는 좀더 민감한 것이었다. 허버드는 중국 정부가 1972년 리처드 닉슨의 획기적인 방문 때 쌍방 간 체결된 상하이 공동성명을 대미 관계의 기초로 보는 것처럼. 김정일도 조명록에 의해 채결된 그 성명을 평양의 조심스런 대미 화해 정책의 기초로 여긴다고 주장했다. 따라서 '적대적 의도를 갖지 않는다는' 공약과 더불어, 공동성명을 재확인해 주지 않으면 문제가 커질 것이라고 그는 경고했다. 부시 정부가 대화를 끝내려 한다고 북한이 믿는다면 김정일이 무슨 짓을 할지 알 길이 없다는 논리였다.
그러나 조지프는 거부 반응을 보였다. 그는 주장했다. "적대적 의도를 갖지 않는다는 것은 단지 북한 측이 쓰는 표현일 뿐이다." 평양의 감정에 미국이 민감해할 이유가 전혀 없다는 식의 얘기였다.
그 뒤의 일을 되돌아보며 허버드는 결론지었다. "이 사람들은 북에 대해 적대적 의도를 가지고 있었으며, 이와 다르게 말하는 것을 잘못이라고 여겼다."
켈리는 클린턴 정부가 대북 대응 면에서 충분히 단호하지 못했다는 공화당 내의 보편적 비판을 공유했다. 그러나 그도 파월처럼 많은 결함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기본 합의가 '난제를 풀어줄 최선의 방안'이라고 생각했으며, 좀더 회의적인 방식이긴 했지만, 대북 관여 정책을 지지했다.
카트먼은 신임 주한 대사로 지명될 것을 낙관하고 있던 터였다. 그에게 대사 자리는 한국 문제에 참여했던 세월의 정점이었다. 그러나 켈리는 주한 대사 자리가 더 이상 그의 것이 아님을 밝혔고, 카트먼은 이때 경악했다. 켈리는 대신 카트먼에게 필리핀 대사 자리를 제안했다. 대화의 기조는 우호적이었다. 카트먼은 켈리와 아미티지가 그를 요직에 배치함으로써 그의 직업적 역량을 보호해주려는 것을 깨닫고 있었다. 그러나 마찬가지로 그를 마닐라로 보내려는 것은 대북 정책 업무에서 그를 교묘하게 배제하려는 의도인 것 또한 분명했다. 카트먼은 한국 대사 자리가 없어졌더라도 한반도 평화회담 특사 일은 계속하고 싶다고 켈리에게 말했다. 켈리는 그 자리 또한 없어졌음을 시사했다.
낙심한 카트먼은 사직서를 제출하고 한반도에너지개발기구 KEDO의 국장으로 자리를 옮겼다. 카트먼은 다음과 같이 술회했다. "부시 행정부가 기본 합의의 숨통을 끊을 수 있을지는 아직도 분명하지 않았다. 그리고 나는 주어진 의무사항을 주의깊게 이행함으로써 기본 합의가 적어도 존속하기를 바랐다. 사실 그렇게 하면 핵문제는 무력화될 수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카트먼은 미국정부에서 가장 경험이 풍부한 북한 전문가로서 부시 행정부를 떠난 최초의 인물이었다. 그러나 그가 결코 마지막 인물을 아니었다. 사실 김정일에 대한 새 정부의 적대감은 빌 클린턴과 그의 동료들에 대한 적대감에만 견줄 수 있었다. 얼마뒤, 'ABC(Anyone But Clinton, 클린턴만 빼고 누구든)'라는 용어가 새 정부의 주문이 되었다.
대북 '평화회담 특사'로 알려졌던 카트먼의 직위를 인계받고 찰스 프리처드는 그 직함으로 명함을 만들었다. 백악관 참모들은 즉각 그에게 따졌다. "그들은 '누가 당신더러 그 직함을 사용하라고 허락했
나? 여기 우리 동네에서는 그런 직함을 쓰지 않는다.'고 말했다." 찰스 프리처드의 증언이다. "누군가 내게 와서 말했다. '평화? 평화회담? 그것은 민주당 용어다. 그것은 클린턴 시절에 나온 것이다. 여기서는 그런 용어는 쓰지 않는다." 그의 직함에서 '평화'라는 단어는 지워졌다.
일단 집무가 시작되자, 조지 W 부시는 세계 각국의 지도자들과 일련의 공식 전화 통화를 시작했다. 가장 먼저 통화한 지도자 가운데에는 한국의 김대중 대통령도 있었다. 2000년 10월, 매들린 올브라이트의 평양 방문 직후, 김대중은 김정일과의 정상회담으로 노벨 평화상을 받았다. 한국의 지도자는 빌 클린턴과 친밀한 관계를 발전시켰다. 미국의 대통령은 김대중을 정중하게 대접했고, 자주 그의 조언을 구했으며, 북한과의 관계를 개선하려는 '햇볕 정책'을 받아들였다. 김대중은 진작부터 부시를 떨어뜨리기 위해 앨 고어 부통령을 성원했던 참이다.
2000년 1월초, 김대중은 <워싱턴 포스트>의 데이비드 이그나티우스 David Ignatius와의 회견에서 자신의 우려를 공공연히 표시했다. 그는 부시 대통령과의 조기 정상회담을 회망한다며, 정상회담에서 자신의 메시지는 다음과 같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진로를 바꾸지 말 것, 대화를 계속하는 것을 지지할 것, 북한 지도자 김정일을 구석으로 몰지 말 것." 김대중은 북한이 진짜로 변하고 있다는 자신의 믿을을 강조했으며, 미군이 한반도에 계속 주둔하는 계획에 대한 김정일의 분명한 전향적 태도를 그 중요한 징후라고 지적했다.
2월 초 최초의 한미 정상 간 전화통화는 좋지 않게 끝났다. 김대중은 부시에게 햇볕 정책을 계속 유지하는 것과 대북 관여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단도직입으로 말하기 시작했다. 그는 김정일의 최근 중국 방문을 언급하며, 부시에게 자신은 북한이 중국식 개혁을 모색하는 것으로 믿는다고 말했다."
김대중이 말하는 동안, 부시는 전화기에 손을 갖다 대고는 프리처드와 해들리를 쳐다보며 '이 사람이 도대체 누구냐'고 물었다. 그날 밤 11시에 프리처드는 느닷없이 콘돌리자 라이스로부터 백악관으로 오라는 전화를 받았다. 대통령에게 김대중이 누구인지를 그의 출신 배경과 철학을 중심으로 설명하고, 왜 그가 초저녁 때의 통화에서 그런 식으로 말했는지를 설명하는 보고서를 쓰라는 것이었다. 프리처드에게 그것은 북한에 대한 인식 차이가 장차 한미 동맹 관계에 심각한 문제를 일으키게 될 것이라는 최초의 징후였다.
1997년 김대중 대통령 선출은 한국에서 대변혁을 뜻했다. 1980년대 말까지 한국은 북한의 위협을 빙자하여 엄혹안 안보 관계 법률로 반체제 인사들을 억압하는 연속적인 군부 독재의 지배 아래 놓여 있었다. 한국을 냉전의 렌즈를 통해 보았던 미국은, 아시아의 우파 정권들에게 그랬듯이, 서울의 권위주의 정권들을 용납했으며, 또한 그들과 협력했다.
하지만 한국이 경제 강국으로 부상하기 시작하면서 민주주의와 정치적 자유에 대한 대중적 요구는 거세어졌다. 전쟁 기간의 외상에 대한 생생한 기억이 없는 젊은 세대는 이 같은 요구에 기름을 부었다. 이 운동은 386세대, 즉 1960년대에 태어나고, 1980년대에 대학을 다녔으며, (당시) 30대였던 사람들에 의해 주도되었다.
미국의 행정부가 바뀌자, 김대중은 신임 미국 대통령의 의도에 대해 우려하며 부시와의 조기 정상회담을 추진했다.
계속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