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장
가까이 하기에 너무 먼
(2000년 10월 23일 매들린 올브라이트 미 국무장관이 김정일 국방위원장을 만나다. 부시, 미 대선에서 승리하다.)
조명록의 공식 직함은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 국방위원회 제1부위원장으로 북한의 정치국에 상당하는 부서의 최고위급 장성이자 군대내 최고 당 간부에 걸맞는 직함이었다.
조명록과 클린턴 맞은편에는 대통령 국가안보팀의 주요 멤버들이 앉아 있었다. 전 유엔대사이자 최초의 여성 국무장관인 매들린 올브라이트, 국가안보보자관이자 1기 대통령 선거 유세 이후 클린턴의 측근이었던 샌디 버거, 그리고 소그룹의 보좌진과 북한 담당 관리들이었다.
평양과의 순탄치 못한 숱한 협상의 대표 협상가였던 찰스 카트먼은 조명록의 군복 차림을 보고 조용히 숨을 삼켰다. 북한은 미국 측 상대방에게 조명록이 백악관에 들어갈 때 군복을 입을 것이라는 데 대해서는 한마디 언급도 없었다. 프리처드는 조명록의 방문을 준비하면서 북한 관리들에게 차수가 군복을 입을 것인지를 분명하게 불었고, 그들은 '노'라고 대답했다.
조명록의 군복에 대해서 웬디 셔먼은 별로 놀라지 않았다. 조명록의 선전선동에 대한 그녀의 첫 반응은 마지못한 직업상의 존중이었다. 그녀는 이렇게 회고했다. "외교에 종사하는 모든 사람에게 연출이 그럴듯하면 우리는 이를 평가해준다. 당시의 연출도 그럴듯한 것이었다."
그 연출이 갖는 상징적 의미는 사실 강력했다. 조명록의 군복은 김정일 뒤에 있는 북한의 당,군 일체성을 과시했다. 또 그의 백악관 방문은 한국전쟁을 개시한 해로부터 정확히 50년이 지난 시점에 이뤄졌다. 3년 뒤 포성이 멎었음에도 1953년 정전 체제는 항구적인 평화체제로 교체되지 못했고, 길이 155마일, 폭 2.5마일의 비무장지대는 철책선을 두른 흉터로 남았고, 도처에 지뢰가 묻혔으며, 양측 모두 중무장한 부대가 경계를 서고 있다. 그곳은 또한 전후 수년간 빈번한 소규모 충돌이 이뤄졌던 지점이며, 그 때마다 적대감의 망령이 새롭게 살아나곤 했었다.
주한미군의 역할은 북으로부터 재침이 있을 때를 대비해 억지력 역할을 하는 것이다. 또 미군은 많은 사람들에게 '인계 철선 trip wire'으로 인식되었다.
그리고 1994년, 양측은 무서울 정도로 전쟁에 가깝게 다가갔다. 평양의 핵 개발 노력에 대해 클린턴 정부의 국방부가, 만약 실제로 그런 일이 벌어지면 한반도가 초토화될지 모를 큰 무력 충돌을 촉발할 수 있다는 매우 실질적인 위험에도 불구하고, 영변 원자로에 대한 선제공격을 심각하게 고려했던 것이다.
이 같은 계속된 긴장에도 불구하고 클린턴 행정부는 외교야말로 평양으로부터의 위험을 경감시킬 최선의 희망을 제공한다는 확신을 가졌고, 이에 따라 이휴 약 6개월간 김정일 정권과 일련의 접촉을 벌였다. 클린턴 팀에게, 백악관의 사진 기자들 앞에서 북한 인민군 군복을 입은 조명록의 모습은 한가지 불편한 진실을 말해주고 있었다. 미국 정부가 가장 우려하는 문제들, 즉 북핵 동결 상태를 유지하고 미사일 프로그램을 후퇴시키며 한반도의 긴장을 완화하는 것 등에 대해 진전을 이루고자 한다면 미국은 혐오감을 꾹 참고서라도 자신이 협오하는 체제의 지도자에게 일정한 존중을 표시하는 것 외에는 달리 도리가 없다는 것이었다. 조명록과 김정일로서는, 이 회담이 북한의 오랜 숙적이 마침내는 '경애하는 지도자'의 정통성과 김씨 가문이 만든 체제를 받아들였음을 보여준는 것이었다.
클린턴과 조명록이 벽난로 앞에 앉았을 때 조명록의 손에는 갈색 가죽 폴더가 들려 있었다. 클린턴의 눈길이 계속 폴더로 향하자, 카트먼의 생각은 조명록의 방문을 계획하던 무렵의 외교적 우여곡절로 되돌아갔다. 9월말 카트먼은 뉴욕의 미국대표부에서 북한 외교관들과, 또 하나의 비생산적인 회의가 될 것으로 예상했던 회의를 가졌다. 북미간에는 두 개의 문제가 핵심 의제로 떠올랐다. 하나는 기본 합의의 지위에 관한 것이었다. 협정이 체결된 지 6년 뒤에도 그것은, 1994년 미국 협상팀을 이끌었던 로버트 갈루치의 표현대로 '차가운 평화' 그 이상이 되지 못했다. 양측 모두 기본 합의가 당초 예상했던 이익을 가져다주지 못했다고 믿으며 언짢아했다.
나머지 또 하나의 의제는 북한의 미사일 프로그램과 관련해 새 회담 일정을 짜는 것이었다. 영변 핵 시설이 폐쇄됨과 아울러, 북한 탄도미상리의 생산, 배치, 시험 및 수출을 봉쇄하는 문제가 클린턴 행정부 대북 정책의 핵심 목표로 떠올랐다. 미국의 관심은 한반도의 미묘한 군사력 균형에만 관련되지 않았다. 1990년대 중반, 북한은 이란과 시리아 등 미국의 주요 적대국에 미사일 및 미사일 관련 기술을 파는 주요 수출국이 되었다. 게다가 1998년 이슬라마바드가 시험 발사한 파키스탄의 사정거리 1,500킬로미터급 중거리 미사일 가우리가 북한의 도움으로 생산되었다는 사실도 분명했다. 사실 파키스탄의 무기는 북한이 자체 생산한 노동 미사일의 개량 복제품으로 인식되었다.
게다가 또 다른 요인도 있었다. 1998년 장거리 미사일 대포동의 발사는 동북아시아 전역과 미국의 신경을 건드렸으며, 특히 미국의 경우 기본 합의에 대한 의제의 지지를 더욱 더 어렵게 만들었다. 1998년 10월, 1999년 3월, 2000년 7월 등 미사일 문제를 논의하기 위한 일련의 대북 회담은 아무런 성과도 내지 못했다.
미국 대통령 선거와 클린턴 임기 종료를 불과 두 달 앞둔 시점에서 카트먼은 진전을 크게 기대하지 못했다.
이제 빌 클린턴과 조명록이 나란히 앉자 대통령은 무엇이 담겨있을지 모를 갈색 폴더에 힐끗 눈길을 주며 물었다. "그것은 제게 보낸 편지입니까?" 조명록은 얼굴이 상기된 채 자리에서 일어났고, 클린턴도 일어나자, 격식을 갖춰 가죽 폴더를 건냈으며, 클린턴은 정중하게 받아 즉석에서 폴더를 펼쳤다. 안에는 북한에 의해 제공된 영문과 함께, 한글로 적은 김정일의 서한이 있었다. 클린턴은 문서를 읽어내려걌다.
대통령은 조명록을 돌아보며, "이것은 훌륭한 서한입니다."라고 말했다. 문서에서 김정일은 북한이 장거리 탄도미사일의 생산, 판매, 그리고 사용을 중지하기(최근 몇년간 미국 대외 정책의 핵심 관심사였다.)위해 준비중임을 언급했다. 조명록 차수는 그 순간을 또 다른 '폭탄 발언'으로 이어걌다. 그는 김정일을 대신하여, 미사일 협정을 매듭짓기 위한 정상회담을 위해 미국 대통령의 평양 방문을 제안하는 바라고 말했다. 조명록은 '만약 당신이 평양에 오신다면, 김정일은 당신의 모든 안보 관심사를 만족시키겠다고 다짐하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그다음 조명록은 전형적인 북한 장군의 태도와는 결코 어울리지 않는 듯한 말을 했다. 찰스 프리처드의 회고에 따르면 거의 '애원'조로 조명록은 클린턴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평양으로 귀환하기 위해서는 이에 대한 당신의 동의를 얻을 필요가 있습니다. 저는 긍정적인 답변을 꼭 얻을 필요가 있습니다."
물론 클린턴은 묵묵부답이었다. 그러나 찰스 카트먼의 견해로는 대통령은 "자신이 미국 대통령으로서 (미사일)협상이 이루어지면 관계를 정상화할 수 있다는 전제를 확고히 하고 있음을 북한 사람들이 확신하고 돌가가는 것이 중요함을 직감"하고 있었다.
클린턴이 말하는 동안 다른 배석자들은 북한의 장군에게서 눈에 띄게 긴장이 풀려나가는 모습을 보고 강한 인상을 받았다. 한 관리는 말했다. "돌이켜보면 조명록의 임무는 클린턴으로 하여금 김정일은 진지하게 생각하게 만드는 것이었다. 그것이 바로 그의 책임이었다. 회담은 순조롭게 끝났다. 웬디 셔먼이 언급한 것처럼, 두 사람이 작별의 악수를 나눌 때까지, "여기서 뭔가, 실질적인 일이 벌어졌다는 것을 우리 모두는 알게 되었으며, "김정일은 협상을 이룰 준비가 되었던" 것이다.
1990년대 초반 이후, 평양의 목표는 미국과의 적대적인 관계에서 근본적인 변화를 꾀하고, 미국이 더 이상 북한을 적으로 간주하거나 위협하지 않도록 만드는 것이었다. 조명록의 미국 방문에서 나온 공동성명은 미국을 바로 그와 같은 위치에 서도록 책임을 지웠고, 냉전의 오랜 두 숙적 사이의 긴장된 관계에 역사적 이정표를 세웠다. 공동성명에서 가장 중요한 선언 사항은 쌍방이 '쌍무 관계에서 새로운 방향을 취할 용의가 있다'는 점을 강조했다는 것이다. 그 첫 번째 중대 조치로서 쌍방은 "그 어느 정부도 타방에 대하여 적대적 의사를 가지지 않을 것을 선언하고, 앞으로 과거의 적대감에서 벗어나 미래의 새로운 관계를 수립하기 위하여 모든 노력을 다할 것을 확인"했다. 클린턴이 평양을 방문하는 문제에 대해서는 쌍방은 "메들린 올브라이트 국무장관은 가까운 장래에 평양을 방문해 빌 클린턴 대통령의 의향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국방위원회 김정일 위원장에게 직접 전달하고 미국 대통령의 방문을 준비한다"고 발표하여 문제를 절충했다.
2000년 10월 23일, 매들린 올브라이트는, 자신의 회고록에서 "바다에 폭풍이 몰아치는 거대한 벽화 앞에 담녹색 카펫이 깔려 있었다.'고 묘사한 바 있는 평양 백화우너 초대소의 그 화려하고 높은 천장의 만찬장에 섰다. 만면에 웃음을 머금고 자신의 트레이드마크인 갈색 작업복과 굽 높은 구두 차림의 김정일은 방안에 들어와 올브라이트의 손을 굳게 잡으며 그녀의 평양행을 환영했다.
"미국 국무장관이 우리나라에 온 것은 정말 이번이 처음입니다." 취재기자와 사진 기자, 텔레비전 카메라맨들이 지켜보는 가은데, 그는 깊고 자신감 있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리고 이것은 역사적인 관점에서도 새로운 일입니다. 저는 아주 기분 좋습니다."
올브라이트가 화답했다. "위원장님, 저도 즐겁습니다. 이 자리에 있게 된 것이 기쁩니다."
김정일은 친근하고 부드러웠다. 김정일은 올브라이트에게 말했다. "쌍방이 모두 진실하고 진지하게 임한다면, 우리가 못할 것은 없지 않겠소?"
올브라이트와 그녀의 팀에게 핵심 이슈는 미사일이었다.
"우리는 장거리 미사일에 아주 관심이 많았으며, 이는 핵단두만 장착하면 미국에 실질적인 위협이 되기 때문이다." 웬디 셔면의 말이다. 아울러 그녀는 "그러나 우리는 만약 중거리 미사일 문제를 처리하지 못하면 일본을 계속 우리 편에 서도록 할 수 없다는 것 또한 이해하고 있었다. 그래서 저들의 모든 미사일 판매와 미사일 관련 기술, 그리고 관련 서비스 계약을 중지시키는 것까지도 우리 협상의 일부로 포함시켰다. 이에 대한 대가, 정확히 그 세가지 사항에 대한 대가로 저들은 관계 정상화의 길을 원했고, 공동성명에 이미 포함시켰듯이, 쌍방간 적대적 의도의 포기를 원했다. 그리고 사실 저들 입장에서는 잘한 것이지만, 정상화를 통해 이익을 볼 수 있도록 완전한 형태의 정상화 관계를 기대했다."
일단 의례적인 인사가 끝나자, 올브라이트는 김정일에게 국무부 언론 담당 리처드 바우처가 기자들에게 '관계 발전에 대한 기대의 개요'라고 밝힌 클린턴 대통령의 친서를 건냇다. 다음, 그녀는 회담의 논의를 미사일 문제로 돌렸다. 그녀는 다음과 같이 회고했다. "나는 김정일에게, 클린턴 대통령에게 무엇을 보고할지 아직 결정하지 않은 상태라고 말했다. 그러나 미사일 문제에 대한 만족스러운 합의 없이는 정상회담을 제안할 수 없다고 말했다."
김정일은 절실히 필요한 외화를 벌어들이기 위해 이란과 시리아에 미사일을 판매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리고 그는 덧붙였다. "결국 확실한 것은 , 우리가 돈을 벌기 위해 수출을 하기 때문에, 귀측이 보상만 보장해준다면, 미사일 프로그램은 중단될 것이오."
올브라이트는 이에 대해 이렇게 답변했다. "국방위원장님, 우리는 지난 50년간 당신의 의도에 대해 우려해왔습니다. 우리는 당신의 미사일 생산에 대해서도 우려해왔습니다. 그리고 지금 당신은 그것이 단지 외화를 벌기 위한 것이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김정일이 다시 말을 받았다. "꼭 외화 때문만은 아니오. 우리는 자위 프로그램의 일부로 우리 군을 무장시켜야 하오."
김정일은 남한의 군사력에 대한 우려를 표시하면서 다음과 같이 덧붙였다. "남조선이 사정거리 5백 킬로미터급 미사일을 개발하지 않는다는 보장이 있으면, 우리도 (개발)하지 않을 것이오. 이미 배치해 놓은 미사일에 대해서는 우리가 할 수 있는 부분이 많다고 생각하지 않소. 여러분이 이 부대에 들어가서 사찰을 할 수는 없소이아. 다만 생산을 중단하는 것은 가능하오. 소련의 붕괴와 중국의 개방, 이로 인해 군사 동맹을 잃은지 10년이나 됏소. 군은 장비를 현대화하고 싶어하지만, 우리는 새장비를 주지 않을 것이오. 대결이 없으면, 무기도 의미가 없소. 미사일은 지금은 우리에게 별로 중요하지 않아요."
올브라이트는 다음과 같이 회고했다. "나는 그가 매우 예의 바르게 자랐으며, 질문에 답하기 위해 보자관을 찾을 필요가 없는 사람이라는 것, 그리고 본인이 직접 협상가로 그 자리에 나온 사람이라는 것을 알게 됐다. 나는 또 그가 자신이 할 말을 분명히 이해하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았다."
2001년 여름, 김정일은 러시아를 가로지르는 4일간의 기차 여행을 했다. 블라디미르 푸틴의 특사로 그 여행을 수행한 콘스탄틴 폴리코프스키가 전한 김정일의 말이다. "먼저, 올브라이트는 검사처럼 나를 심문했다. 나는 모든 질문에 답했고, 올브라이트는 내가 준비된 자료를 이용하는지 또는 준비 없이 즉석에서 이야기하는지를 유심히 지켜봤다. 나는 즉각즉각 내 생각대로 간략하게 의사를 표현했다. 그녀는 이런 내 스타일이 마음에 들었던 것처럼 보였다."
한편 첫 회담이 끝난 뒤 김정일은 올브라이트에게 그날 저녁 특별히 놀랄만한 일을 준비했음을 알려주었다.
올브라이트 대표단은 어둠 속에서 이제는 텅 빈, 그리고 밤의 정적에 휩싸인 평양 거리를 지나 5.1 경기장으로 달렸다. 경기장 내부 또한 어두었다. 김정일은 올브라이트와 함께 경기장으로 들어갔다. "엄청난 군중이 있었다. 그리고 그들은 우렁찬 환호를 보냈다.
그날 공연의 촛점은 공장, 트랙터, 전기변압기, 그리고 농장을 통한 경제 건설이었으며, 이는 경제 발전에 좀 더 촛점을 맞추고자 하는 김정일의 희망을 반영하는 것이 분명했다. 그러나 단 하나 특별한 군사 관련 장면이 있었는데, 그것은 대포동 발사 장면, 즉 국무장관이 평양까지 찾아와 김정일에게 포기하도록 설득하게 만든 바로 그것을 보여주는 플래카드의 일사분란한 움직임이었다. 군중들이 함성을 지르자 김정일은 올브라이트를 돌아보며 말했다. "저것이 바로 우리의 처음이자 마지막 미사일 발사가 될 것이오."
올브라이트는 훗날 이렇게 말했다. "우리가 평양에서 말하려던 것이 바로 그것이었기 때문에, 우리는 그의 말을 의미심장히게 받아들였다." 올브라이트는 김정일이 미사일 협상 타결을 진지하게 생각하는 것이 틀림없다고 여겼다.
이튿날 오후 올브라이트와 김정일, 그리고 그들의 참모진들은 두번째 회동을 가졌다. 올브라이트가 서두를 꺼냈다. "위원장님도 아시다시피 우리 전문가들이 오늘 아침 미사일 문제를 두고 만났고, 우리 측은 위원장님께 많은 질문을 드렸습니다. 위원장님께서 그것을 살펴보셨기를 바랍니다."
아인혼에 따르면, 김위원장은 처음에는 고개를 좀 갸웃거리더니, 이내 강석주를 돌아보며 잠깐 숙의하는 모습을 보였다. 강석주가 자신의 서류를 훑어보며 번역된 질문들을 꺼집어냈고, 김정일과 또 한번 논의한 뒤, 그것을 그에게 건냈다. 그러고 나자 김정일은 다시 국무장관을 향해 말했다. "사실 이 자리에서 이 질문을 처음 접했지만, 어쨋든 답변을 주게 되어 기쁘게 생각한다." 이 말을 전한 아인혼은 이어서 "그 때 한가지 흥미로웠던 것은, 그가 전체 질문의 약 3분의2에 대해 정확하고 매우 긍정적인 답변을 한 것"이라고 술회했다.
다시 웬디 셔먼의 술회다. "김정일은 요점을 썩 잘 말했다. 그는 '자, 그림 좀 살펴봅시다."라고 했다. 그리고 14개 질문 리스트를 훑어내려갔다. 그는 질문 하나하나에 꼼꼼하게 답변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14개 질문에 대해 모두 답변했다. 그중 몇몇은 상당히 기술적인 수준의 질문이었으며, 나는 오느 대통령이나 총리도 그가 답변했던 것만큼 잘해내지 못했을 것이라고 단언할 수 있다.
김정일이 어떻게 답변해야 할지 난감한 부분을 어떻게 처리하는지를 보고 아인혼도 똑 같은 인상을 받았다.
다음은 아인혼의 말이다. "그 대목에서 재미있었던 부분은 그가, 자신이 무엇을 모르는지 안다는 사실이다. 모든 것을 다 아는 듯한 분위기에도 불구하고, 그가 뭘 모르는지를 안다는 사실, 그것이 우리에게 깊은 인상을 주었다.
김정일은 금수 조치는 미사일 뿐 아니라 부품과 기술에도 적용될 것이며, 그것은 기존의 계약에도 적용되라라는 것, 그리고 자신은 MTCR에 가입할 용의가 있다는 것을 올브라이트에게 말했다. 다른 이슈들, 즉 금수조치가 추가적인 미사일 생산, 시험, 배치에도 적용될지, 또는 기존의 모든 미사일의 폐기를 뜻하는 것인지, 금수조치에 해당하는 미사일의 사정거리, 그리고 특히 검증 문제 등에 있어서는 의견 차이가 있었다. 김정일은 그러나 긍정적인 톤으로, 북한과 미국의 전문가들이 좀 더 심층적인 논의를 위해 말레이시아 퀄라품푸르에서 다음 주에 만나자는 데 동의했다.
김정일은 또한 미국의 오랜 대북 갈등의 역사에서 가장 논쟁적인 문제들, 이를테면 주한 미군의 역할 등에 대해 타협적인 태도를 취했다. 김정일은 냉전 종식 이후 미군에 대한 자신의 생각이 바뀌었으며, 지금은 미군이 안정화를 위한 역할을 수행한다고 본다고 말했다. 비록 김정일은 올브라이트에게, 자신의 군 지도부는 미국과의 관계 개선에 대해서는 찬반이 거의 엇비슷하게 나뉘어져 있으며, 외무성의 일부 관리들도 워싱턴과의 회담을 반대하고 있지만, 과거 수십년간 미군의 철수를 핵심 요구 사항으로 삼았던 정권에게 그것은 아주 놀랄만한 전환이었다. 올브라이트에 따르면, 김정일은 '그에 대한 해답은 바로 관계 정상화에 달린 것'이라고 말했다.
이틑날, 칼린은 남쪽으로 넘어가기 위해 거의 버려지다시피 한 고속도를 타고 남쪽 비무장지대로 차를 몰았다. 몸은 지쳐 있었으나 그의 기분은 날아갈 듯 했다. 클린턴-김정일의 정상회담의 성사 가능성, 50년 이상 지속된 한반도에서의 적대감과 위험의 청산, 이런 것들이 조바심 날 정도로 눈 앞에 가까이 다가온 듯 했다. 칼린은 서울에 돌아와 대통령이 평양을 방문할 경우 올브라이트와 클린턴이 검토해야 할 공동성명의 초안을 작성했다. "미 합중국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보다 정상적인 관계 발전은 쌍방 국민의 이해에 부합하며, 한반도 및 아시아태평양 지역 전체의 장기적인 평화와 인정에 이바지할 것이다."라고 칼린은 썼다. 이어서 덧붙였다. "양국 지도자는 ......과거의 적대감에서 벗어나 비적대적 관계를 건설하기로 한 공약을 재확인한다. ......"
서울에서 한국의 김대중 대통령은 클린턴에게 평양행 위험을 감수하라며 끼어들었다. 한 전직 고위 관리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그것이야말로 김 대통령이 예전에 말씀했던 바다. 북한 체제는 김정일이 궁극적으로 모든 결정을 하는 공산 체제이고, 바로 그렇기 때문에 당신네는 그와 담판해야 한다. 최종적인 결과나 결정을 하는 과정이 없을 수도 있다. 그러나 김정일은 변할 수 있다. 그는 손가락 마디를 똑똑 꺾으며 남의 신경을 잔뜩 건드려놓는 방식으로 결정한다."
미국인들이 투표장으로 향하던 무렵, 북한은 미국과의 화해 작업을 계속 하고싶다는 신호를 보냈다. 선거 당일 북한의 관영 <로동 신문> 논평은 북미 간 '다차원적 접촉과 대화'를 치하했다. "두 나라의 관계 개선은 두 나라 국민의 희망과 이해에 부합한다."라고 논평은 주장했다.
계속됨.